해가 뜨지 않는 19세기 영국. 그곳에서 다시 태어난 나는 한 통의 편지를 받는다. 「자네가 꼭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네. - 자네의 오랜 벗으로부터」 이 세계는 악으로 가득 차 있다. # 삽화관련 설명 전툴루 관련\파일명.jpg 표시는 전툴루 관련 폴더에서 삽화 찾아보실수 있습니다 + 01. 40년 인생 넋두리 좀 해보자 안녕하신가. 뇌내 독자 여러분. 갑작스럽지만 내 이야기를 들어주길 바란다.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어쩌다 뇌내 독자들을 상대로 하소연하지 않으면 안되는 지경이 이르렀는지 말이다. 우선 터무니 없는 이야기를 해보자면, 나는 아무래도 과거로 환생한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이세계일지도 모른다. 내가 그것을 헷갈리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도 조만간 설명하겠다. 그 부분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니까. 죽기 전에 나는 21세기 대한민국이라는 아시아 국가에 살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여기는 19세기 영국의 런던이다. 현재는 전생보다 현생이 긴 탓에 서울보다도 고향으로 느껴지는 장소였다. 나는 1855년, 몰락한 남작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전생에 영어를 못한 탓에, 내가 말문을 트게 된 것은 3살 무렵이었는데, 간신히 내 처지에 대해 깨닫자마자 나는 한 가지 인생 목표를 정하게 되었다. '우선 살고 보자.'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 낭만이 넘치는 벨 에포크 시대라고? 귀족이니까 금수저? 직접 살아보면 알겠지만 완전 웃기는 소리다. 아니, 상상을 좀 해보라. 산업 혁명으로 하층민 인권은 인류사 최저점을 찍었던 시절이고, 팽창하는 제국주의로 세계 곳곳에선 전쟁이 끊이질 않았으며, 풍토병이라도 걸리면 의료고 뭐고 없이 한 방에 훅 가던 시절. 그런 끔찍한 시대에 몰락 귀족의 셋째라고? 21세기에서도 통용되던 말이지만, 귀족이란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나는 우리 집에서 돈 냄새 나는 문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21세기 대한민국 출신이던 나는 성공과 학위를 따로 생각할 수 없어서 필사적으로 공부에 전념했다. 학벌이란 보험이나 마찬가지다. 들고 있으면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린 듯한 망나니의 삶을 산 첫째 형과, 어릴 때부터 은행을 다니며 연수하던 둘째 형과 달리 나는 없는 형편에 고집을 부려가며 대학 졸업장을 거머쥐었다. 이전 생의 부모님에게도 그렇지만, 이번 생의 부모님, 그리고 둘째 형에게는 아무리 고개를 숙여도 부족했다. 첫째 형? 그 새끼는 아무래도 좋아. 아무튼, 대학에서도 열심히 하는 모습이 이쁘게 보였는지, 교수님들로부터 유독 사랑받으며 학연을 다진 나는 추천장을 들고 군대에 자원했다. 귀족 사회에서 인맥을 다지려면 장교로 들어가는 게 최고라는 조언을 들은 탓이었다. 대학 졸업하고 군대가는 모습이 익숙해 보인다고? 분명 착각일 것이다.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4년 간의 해군 장교 생활은 내 경력을 확실히 다져주었다. 그리고 의외로, 정말로 의외로 생각보다 적성에도 맞았다. 전투에 참가했다가 왼다리를 날려먹지만 않았으면 말뚝을 박았을지도 몰랐다. 그런 식으로 명예 제대한 나는 1년간 놀고 먹다가 탐험가가 되기로 결정했다. 뜬금없다고? 뭐, 실제로도 그랬다. "어렵지도 않아. 그냥 2~3년 해외에 나가 있다가 본 걸 그대로 책으로 써서 내면 돼. 요즘은 탐험가가 돈을 버는 법이야. 저 찰스 다윈처럼 말이야." 나는 그 말만 듣고 다음 날, 항구로 나가 무작정 출국일을 결정했다. 그렇다, 나는 무지 귀가 얇았던 것이다. 운이 좋아 장교 시절 인맥으로 나는 마침 암흑 대륙으로 나가는 배에 연구자 자격으로 얻어 탈 수 있게 되었다. 아, 그래, 이 부분이 내 전생의 기억과 다른 부분 중 하나였다. 암흑 대륙이란, 정확히 아프리카를 가리키는 말로 이상할 정도로 개척되지 않아, 산업 혁명이 도래한 현재까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장소였다. 여하튼, 그렇게 암흑 대륙과 영국 사이를 4년 정도 왕복하며 지내던 나의 무모한 여정은, 내가 말라리아에 걸리며 끝나게 되었다. 죽었다 생각하고 몇 달 정도 고향집에서 요양하며 지냈더니, 하느님이 보기에도 좀 불쌍했는지 기적적으로 회복하게 되었다. 펜을 잡을 만큼 체력이 회복된 나는 지금까지 배운 학문과 보고 들은 것을 결합해 몇 권의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어쩐지 나는 영국에서 꽤 유명인이 되어 있었다. 머리가 나빠 아무리 공부해도 따지 못했던 박사 학위도 모교에서 인정해주며 명예 박사가 되었으며, 군대에서 다리하고 바꿔 먹은 훈장 덕분에 꼬박꼬박 연금도 나오고 있었고, 책의 인세도 많지는 않지만 꾸준히 들어왔다. 명예 박사를 인정받은 덕에 여기저기서 강연 요청이 들어와 부수입도 되었다. 그렇게 몇 년을 바쁘게 지나니, 어느덧 불혹의 나이가 된 나는 생각했다. '이제 인생을 좀 즐기며 살아도 되지 않을까.' 나는 이 정도면 진짜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한다. 중간중간 운도 따랐고, 몇 번을 해도 이보다는 더 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임대받아 살고 있던 다락방을 나와, 런던의 아파트로 이사했다. ...뭐, 여기까지가 내 일생이다. 이 정도면 내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대충 알았을 거라 생각한다. 1895년, 머지 않아 20세기가 찾아온다. 그리고 나는 그 격동의 시기를 견뎌내기 위해, 모든 준비를 다했고 이제 인생의 안정기에 들어섰다고 생각했다. 불과 엊그제까지는 말이다. 자, 그러면 지루한 아저씨 넋두리는 여기까지로 하고, 여기부터가 중요한 이야기다. 내가 이렇게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뇌내 독자들을 향해 주절주절 떠들 수밖에 없는 이유를 포함해서 말이다. 어디서부터 설명하는 게 좋을까. 그래, 모처럼 소설이니, 소설처럼 시작하는 것도 좋겠지. 모든 것은 나의 오랜 친구, 아서에게서 온 편지에서 시작되었다. ───────────── 친애하는 필레몬에게 안녕하신가, 강녕한가? 물론 그렇겠지. 지난 몇 년간 자네 이름을 들을 때마다 1 파운드씩 모금받았다면, 그 돈으로 썩어가는 저택 지붕을 뜯어내 새로 짓고도 잔돈이 남았을 테니까. 아무튼 나는 멋대로 자네가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하겠네. 내가 걱정한다고 뭐가 바뀌는 것도 아니지 않나. 예의가 없는 것은 용서하길 바라네. 자네에게 편지를 쓰기 위해, '무례하지 않게 편지 쓰는 법'따위의 책을 사서 읽었네만, 도통 알아먹을 수가 있어야지. 자네도 내가 편지 쓴 날의 날씨 이야기나, 정원의 상태가 어떠니 하는 이야기에 관심 없으리라 믿고 과감히 생략하겠네. 나로 말하자면 요즘 아주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네. 지난 십년간 계속했던 연구에 결정적인 도움을 줄 중대한 발견을 했기 때문이지. 덕분에 매일같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네. 아주 행복한 비명을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자네의 화려하고 즐거운 인생에 찬물을 뿌릴 생각은 없네만, 내가 이렇게 편지를 쓴 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네가 꼭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 그렇다네. 정확히 말하면, 박사 수준의 학식이 있으며, 해외를 두루 돌아본 넓은 견문을 가졌으며, 군인의 강한 정신력을 지닌 사람의 도움이 간절히 필요하네. 마침 자네가 딱 적임이 아닌가! 자세한 사항은 편지를 쓰는 시간이 아까워 만나서 이야기 하도록 하지. 저택의 위치는 자네가 아는 그 장소에 그대로 있네. 뭐, 발이 달린 것은 아니니까. 당신의 벗, 아서가. ───────────── 나는 지독한 악필로 쓰인 그 편지를 해독하듯이 정성을 기울인 끝에 마지막 문장까지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글씨체만큼 난잡한 내용에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었다. 아서 프랑크. 그와는 대학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지만, 나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그보다 더한 기인을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사람이냐? 글쎄... 그에 대해 한 문장으로 표현해보자면 이런 식으로 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아이 같은 이기심과, 고양이 같은 호기심, 그리고 끝을 모르는 꿈을 가진 몽상가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더해도 그가 물려받은 막대한 재산만은 못할 것이다." 상상이 가는가? 아마 잘 되지 않을 것이다. 학생 시절을 그와 함께 보낸 나는 요즘도 종종 그가 내 꿈 속에 등장한 인물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친절히 편지지에 사진 한 장을 동봉해서 보내줬다. 나는 5분 정도 그 흑백 사진이 뭘 나타내는지 이해하려다 포기했다. 무슨 사람이 앉은 모양의 동상 같은데, 사진기가 흔들린 탓에 피사체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즘은 버튼만 누르면 바로 찍히는 사진기도 있는데...." 나는 중얼거리며 불평했다. 아서는 최신 문물에 약했다. 아직도 몇 분이나 기다리지 않고는 상이 잡히지 않는 구식 카메라를 쓰고 있을 것이다. 그에 반해 몇 년 사이에 어디든 들고 다니며 바로바로 찍을 수 있는 사진기가 나온 것은 참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의 발전이란 참 대단하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스마트폰이 있던 시대에서 온 사람치고는 참 잘도 적응한 셈이었다. "이래서야 사진을 보내는 의미가 없잖아." 나는 사진을 팔랑거리며 불평했다. "주인님, 무슨 일이세요?" 내 혼잣말을 들었는지 집에서 일해주는 가정부 마리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며 물었다. "아니, 내 옛 친구가 편지를 보냈는데, 아주 못된 장난을 쳐서 말이야. 볼 수 없는 사진을 찍어 보냈지 뭔가." "볼 수 없는 편지요?" "그래, 사진 찍는 솜씨가 아주 엉망이야. 혹시 자네는 이게 뭔지 알아보겠나?" 나는 별 다른 기대없이 사진을 가정부에게 건넸다. "무슨 사람이 앉아 있는 모양의 동상 같은데." "사람이요?" 그러자 마리는 이상하다는 듯이 반문했다. "이건 전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걸요." "그럴 리가. 어딜 봐도 사람이야. 팔도 있고, 다리도 있고." 내가 사진을 손가락으로 집으며 말하자 마리는 더욱 알 수 없다는 듯이 눈살을 구겼다. "제가 주인님보다 똑똑할 리는 없으니...." "아, 또 시작이군. 그냥 말하게. 나는 세간에서 말하는 것처럼 똑똑한 사람이 아니고, 설령 그런 사람이라도 뭐든지 아는 건 아니야." "하지만 알다시피, 주인님은 언제나 제가 말하면 아니라고 말하지 않나요?" "제발 좀. 뭐가 또 불만인가. 꽁치 파이를 만드려고 한 걸 막은 것 때문이라면 사과하겠지만, 난 그걸 절대 먹진 않을거야." 마리와 나는 잠시 쓰잘데 없는 신경전을 유지했다. 그녀는 내가 굉장히 까다로운 입맛을 가진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고,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이미 전생보다 현생이 길 정도로 오래 살았지만, 여전히 내가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은 바로 식사 부분이었으니까. 현대의 온갖 먹거리를 즐기다, 19세기의 투박한 영국식을 먹고 있으니 입이 즐거울 리가 없었다. "좋아요. 제가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머리? 부분 때문이예요." "머리?" 내 시선이 마리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이게 사람이라면 이건 머리가 되겠죠?" "그렇지." "하지만 사람의 머리는 이렇게 크지도, 일그러지지도 않았어요." 나는 잠깐 그녀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잠시 후,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21세기에는 다양한 미디어 매체로 여러 형태의 그림을 보게 되며, 데포르메적 기법에 익숙해지곤 한다. 하지만 내가 살고 있는 근대 영국은 그렇지 않았다. 만평이나 캐리커쳐 같은 그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저질 문화로 여겨져 일상적으로 접할 물건은 아니었다. 그런만큼 현대인은 근대인보다 형상을 보고 '인간이다', 라고 생각하는 허용의 폭이 훨씬 넓은 셈이었다. 이 비인간적인 머리를 보고도 팔 다리 같은 게 달렸으니, 인간이다, 라고 확신한 나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걸 만든 사람은 근대, 혹은 그 이전 시대의 사람.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것이 인간을 묘사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훨씬 높은 것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성의 접근이었다. "확실히 그렇군... 놀라워...." "주인님이 어쩐 일로 순순히 인정하시는군요." 내 감탄사에 마리가 놀라며 말했다. 이 대화로 말미암아 뇌내 독자 여러분이 오해가 없길 바란다. 나는 사용인에게 아주 친절하고,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는 사람이다. ...아무튼, 그 독백에 기분이 나빠진 나는 마리에게서 사진을 뺏어, 편지 봉투에 다시 집어 넣었다. "지금부터 외출할거야." "늦게 들어오시나요?" "가까운 곳은 아니니 아마 그렇겠지. 어쩌면 자고 올 수도 있어." "기차를 타시나요?" "아니, 그 정도는 아니야. 마차를 타고 갈거야." "잘됐군요." 잘됐군요? 무슨 뜻이지? 나는 더욱 기분이 나빠져 외출용 지팡이를 잡고 일어났다. 그런 나를 향해 다가온 마리는 롱코트를 입혀줬다. 나는 코트를 입은 뒤, 그녀가 내미는 모자를 챙겨 머리에 썼다. 나는 마리의 배웅을 받으며 절뚝거리며 현관으로 나왔다. 그리고 문득 생각나 뒤돌아보며 말했다. "돌아갈 때...." "문단속은 잘하고, 굴뚝도 확인할게요." "창문...." "창문걸이도 걸어놓고, 커튼도 치란 말이죠?" 아주 심통이 난 나는 문을 쾅 닫으며 나갔다. ...다시 말하건데, 나는 사용인에게 아주 친절하고, 열린 마음으로 접근하는 사람이다. 부디 오해가 없길 바란다. 여하튼... 나는 그 길로 아서 프랑크에게 향했고, 내 인생은 격변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02. 아서 프랑크의 기괴한 저택 거리로 나오자 템스 강의 비릿한 향기가 코 끝을 찔렀다. 런던을 가로지르는 이 런던의 흉물스러운 상징물은 수십 년간 공장에서 흘러나온 오수로 어떤 생물로 살 수 없는 썩은 물이 되었다. 문장으로 묘사하자니 여간 불쾌한 것이 아니다만, 감히 고백하건대 나는 이 불쾌한 기름 냄새를 사랑했다. 비록 10년 정도는 군 생활과 탐험가 생활로 떠나 있었지만, 두 번째 일생을 런던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는 이것이야말로 고향의 냄새였다. 가까이 가면 아토피가 도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나는 템스강 주변을 따라 걷는 것을 즐겼다. ───빵빵! "비켜요! 비켜요!" "어이쿠." 어느 틈엔가 뒤에 바짝 다가온 마차가 아슬아슬하게 등 뒤를 스치고 지나갔다. 적기를 단 마차 뒤로는 직전 크락션을 울린 자동차가 매연을 뿜으며 느긋한 속도로 지나갔다. "눈 뜨고 다녀요!" 나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며 욕설을 내뱉고 지나가는 마부를 얇은 눈초리로 노려봤다. "요즘 것들은...." 요즘 것들은! 아, 평생 그 말이 내 입에서 나오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요즘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나이를 먹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21세기의 기억을 가진 풋내기가 뭔 소린가 싶겠지만, 19세기의 내가 보기엔 요즘 것들은 다 글러 먹은 놈들밖에 없었다. 내가 어릴 적 품었던 어른과 귀족에 대한 공경심을 보이는 청년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전생자로 살다 보면 이런 아이러니를 수도 없이 만나곤 했다. 의회에서는 역사적인 악법, 적기조례의 폐지로 한참 시끄러웠지만 나는 그 역사적 순간에 어떤 감격도 느끼지 못했다. 오히려 규제를 잃은 자동차들이 얼마나 많은 사고를 치고 다닐지 걱정스러울 따름이었다. 꼰대라고? 무슨 말씀을. 이래 봬도 진취적 사고의 21세기 현대인이다. 그런 내가 19세기 꼰대가 될 리가 없지 않은가. 여하튼, 나는 길 끝에 선 채, 몇 번이나 곤혹을 치른 끝에 마차를 잡을 수 있었다. "어디로 갈깝쇼?" 마부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묻자,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다 말했다. "시외, 프랑크 저택으로." "프랑크 저택이요?!" 그러자 마부는 놀란 듯이 눈을 부릅뜨며 반문했다. "왜 그러지?" "나리, 나쁜 말 하지 않습니다만, 아마 속고 계신 걸 거예요." "뭐?" 고작 지인 저택을 방문하겠다는데 설마 마부가 말릴 줄은 몰랐기에,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문했다. "프랑크 백작님이 주최하는 신비학 학술회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다고요. 보셔요." 마부는 옆구리에 꽂아놨던 일간지를 내게 건넸다. 아, 데일리 텔레그래프. 노동자들이 즐겨 읽는 일간지였다. 나는 그다지 즐겨 읽지 않았다. "농담란에 실린 명단이 있지 않습니까?" 분명히 있었다. 프랑크의 바보들. 거기에는 나도 알법한 명사들의 이름이 주르륵 적혀 있었다. "이게 뭔가?" "피해자 목록입니다. 프랑크 백작님께서 친히 저택 앞까지 도착한 바보들의 이름을 적어 제보한 겁니다. 어르신도 망신당하고 싶지 않으시면 돌아가시는 게 나을 겁니다." ...아하, 보아하니 아서가 내가 모르는 사이에 아주 화려한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그것도 런던 시민이라면 마부조차 알 정도로 유명한 소동을 일으키면서 말이다. 아서 프랑크는 언제나 그런 사람이었다. 어디서나 눈에 띄고, 상상도 못한 기행을 마구 저질렀다. "아니, 가주게. 내 걱정은 말고. 나는 아는 사람을 보러 갈 뿐이야." "가신다면야 저야 말리지 않습니다만...." 마부는 미련이 남은 듯이 중얼거리곤 고삐를 흔들었다. "이럇!" ──다그닥 다그닥... 마차를 끄는 말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시트를 통해 중독적인 흔들림이 전달되기 시작했다. 나는 뚫린 창 위에 팔을 걸치며 그 너머로 회갈색 런던 하늘을 구경하며 생각했다. '아서는 왜 나를 찾았을까?' 그는 인복이 아주 많은 인물이다. 학자를 원한다면, 아서는 병상에 누워 있는 찰스 다윈을 일으켜 세우고 남았다. 탐험가를 원한다면, 남극해를 떠도는 로알 아문센의 뱃머리를 돌릴 수도 있었다. 군인을 원한다면, 여왕께서 기쁜 마음으로 당신의 첫 번째 왕실 드라군 근위병에서 가장 훌륭한 병사를 내줄 것이다. 모두 나보다 낫다면 나았지 못한 것은 없는 사람들이었다. 반면에 나는 몇 가지 특이한 경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의 눈에 찰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대학 시절부터 아서가 내게 보여준 관심은 비정상적이었다. 철없던 시절에는 부유한 그의 호의를 즐기기도 했지만, 그것이 점점 부담스러워진 것도 내가 입대한 것과 무관하진 않았다. 제대한 이후로 그의 연락을 받은 적이 없었기에, 나는 완전히 그의 눈 밖에 난 것이라 믿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런 편지가 날아온 것이었다. "정말로 놀려 먹을 생각은 아니겠지...." 나는 마부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아서가 그의 부유한 진짜 친구들과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에 앉아서, 요 몇 년 반짝 유명인이 절뚝거리며 문 앞에서 서성이는 모습을 보며 낄낄대는 것 말이다. 내 치부를 밝혀내기 위해 애쓰던 신문사는 좋아라고 날 조롱하겠지. '아니, 그럴 리가 없어. 그렇게 음습한 녀석은 아니었으니까.' 나는 애써 불안한 생각을 떨쳐내고 잠들려고 시도했다. 노력까진 필요도 없었다. 수마는 마차의 편안한 흔들림을 틈타 날 순식간에 꿈속으로 끌고 들어갔으니까. ......... ..... ... .. . "어르신, 도착했습니다." 나를 깨우려던 마부는 손이 닿기도 전에 내가 눈을 부릅뜨자 흠칫 놀라며 물러났다. 좀처럼 깊이 잠들지 못하는 건 군 생활 이후로 생긴 버릇이었다. 내 다리가 불편한 것을 눈치챈 마부의 도움으로 마차에서 편하게 내려온 나는 감사의 뜻으로 팁을 듬뿍 더해 마부에게 건넸다. 그는 크게 기뻐하며 물었다. "하지만 이런 외진 곳이면 마차를 잡기도 힘들겠군요. 시간을 알려주시면 마중 나올까요?" 나같이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는 감사한 배려였지만 이번에는 정중히 사양하기로 했다. "알트가 자동차를 갖고 있거든. 그가 시내까지 데려다 줄 거야." 잠시 알트가 누군지 곰곰히 생각하던 마부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프랑크 백작님 말씀이십니까?!" 나는 잠깐 유명인과 아는 사이라는 것을 과시하는 독특한 즐거움을 맛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부는 한동안 어벙한 표정으로 나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고 허겁지겁 저택을 떠났다. 나에게 한 이야기로 무슨 해코지를 당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이다. 떠나는 마차를 지켜보던 나는 저택 입구에서 벨을 눌렀다. ───삐이이! '정원사를 해고했나?' 내 의문은 정당한 것이었다. 담장 너머로 담쟁이덩굴이 절제 없이 빠져나오고, 심지어 그늘진 곳에는 이끼마저 피어 있었다. 저건 버섯인가? 모든 것이 명가의 저택치고는 후줄근했다. 문을 열어줄 사용인을 기다리며 고딕식 창살 대문 너머로 저택의 정원을 엿봤다. 젊은 시절에 몇 번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다른 정원에 온 것처럼 바뀌던 화려한 풍경에 감탄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문 너머로 보이는 정원은 내가 기대한 것과 많이 달랐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과 정원수만 갖다 놓은 것 같던 화려하고 조화롭던 정원은 어디 갔는지, 나는 그것을 정원이라 부를 수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가시나무 투성이였다. 저택까지 이어진 돌길을 제외하고는 가시나무와 붉은 장미가 마구잡이로 엉켜서 자라고 있었다. 가시를 가진 두 식물이 서로 밀어내며 누가 더 뾰족한 가시를 가졌는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어느 쪽이 승리하건 이 정원은 파멸하겠지. ───덜컥. 내가 그런 감상을 품고 있자 대문이 저절로 열렸다. "자동문이라고?" 세상에. 언제부터 이 저택이 이렇게 하이테크놀러지 해진 거지?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내가 들어오자 그걸 감지라도 한 듯이 문이 저절로 닫혔다. "저절로 닫히기까지?" 나는 한 번 다시 놀랐다. 이것이 영국의 기술력인가. 21세기도 적수가 되지 않는구나. 아마 200년만 있으면 따라잡을 수 있겠지. 가까이서 본 가시 정원은 더욱 장관이었다. 저택으로 향하는 돌길을 걸을수록, 양쪽의 가시덤불이 서서히 침범해와 종국에는 나를 삼키려는 것 같다는 착시마저 일어났다. 폐쇄공포증 환자라면 견딜 수 없을 감각이었다. 저택 풍경에 대해 한마디로 요약해보자면, "수상쩍군...." 지난 2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저택은 음산한 추리 소설의 배경처럼 변해 있었다. 안 좋은 징조였다. ───쿵쿵쿵! 문 앞에 도착한 나는 문고리를 잡고 세게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잠금쇠 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분이십니까?" "허버트. 필레몬 허버트." 잠금을 풀고 상대를 묻는 건, 조금 순서가 어긋나지 않나? 나는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순순히 이름을 불었다. "...그런 분은 초청받지 않았습니다." "뭐? 그럴 리가 없어. 리스트를 제대로 확인하게!" 상대의 대답에 내 머릿속에 마차에서 떠올렸던 불길한 가능성이 다시 떠올랐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안에서는 종이 넘기는 소리가 태평하게 들려왔다. 끔찍하게 길게 느껴진 1분이었다. "...다시 확인해도 그런 분은 없습니다." "잠깐 그 바보 같은 리스트를 보여보게!" "그렇게 말하셔도...." ───쿵쿵! 나는 난폭하게 문고리를 다시 내리쳤다. 그 자식은 나한테 편지를 썼단 말이야. 거기에 제대로 적혔던 이름이 다르게 적혀 있을 리가.... ...설마. 나는 문득 떠오른 가능성에 오만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플록시노시니힐리필리피케이션." "네?" "플록시노시니힐리필리피케이션라는 단어는 없나? 그게 아마 나일 거야." 실내에서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다시 발음해주시겠습니까?" "플록시노시니힐리필리피케이션." "플록시노...." "시니." "시니." "힐리필리피케이션." "플록시노시니힐리필리피케이션. 아, 네, 있군요." 허탈한 나머지 무릎에 힘이 풀렸다. 나는 쓰러지지 않기 위해 온 힘으로 지팡이를 눌렀다. 플록시노시니힐리필리피케이션. 발음하기조차 끔찍하게 어려운 이 단어는 셰익스피어가 만든 말로.... 아니, 집어치우자, 그건 우리 둘이 만든 일종의 농담이었다. 아서는 나를 공적 장소에서 플록시노시니힐리필리피케이션라고 소개하고, 주변 사람들을 놀려먹는 그런 종류의 혈기왕성한 농담 말이다. 나는 그가 그 농담을 아직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걸 기억하는 나 자신조차 너무 부끄러워 참을 수가 없었다. 달칵. "플록시노시니힐리필리피케이션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허버트로 충분하네." 나는 노집사의 뻔뻔함에 기가 질려 힘없이 대답했다. 설마 들어가기 전부터 이렇게 진이 빠질 줄은 몰랐다. 나는 문을 열어준 노집사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가, 그것이 아주 무례한 일인 줄 알면서도,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무슨 문제라도?" "아니, 아무것도. 미안하네." 노인은 말 그대로 기괴했다.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선 쭈글거리는 얼굴은 반쯤 녹아내린 것처럼 보였고, 나이조차 짐작할 수 없었다. 그것뿐이라면 고령의 노인을 부려 먹는 아서의 무심함을 욕하면 그만이었으나, 노인의 몸은 건장한 청년의 그것 같았다. 목을 경계로 노인과 청년, 다른 두 사람이 붙어있는 듯한 부조화의 화신이었다. "그러면 허버트님, 주인 어르신이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나는 기괴함에 압도되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천천히 앞장서 걸었다. 뒷모습만으로는 노인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 어깨가 넓었으며, 허리는 곧았고, 키마저 더 컸다. ───삐걱... 삐이걱.... 걸을 때마다 습기 먹은 마루가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귀신 들린 저택 같았다. "마루를 가는 게 좋겠군." "하하. 의미가 없어서 말이죠." 의미가 없다? 그게 무슨 뜻이지? 내가 그 말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는 와중, 노집사와 나는 몇 개인지 모를 방문을 지나갔다. 사람이 사는 저택이라기보다는 호텔 복도를 걷는 느낌이었다. 나는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 물으려 했으나, 그럴 필요가 없어져 입을 다물었다. 노집사는 어떤 문 앞에 멈춰선 뒤에, 아주 정중한 동작으로 노크했다. 노크하는 방법을 방금 배운 사람처럼 말이다. ───똑똑. "플록시노힐니필리피케이션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안쪽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틀림없는 아서의 목소리였다. "고맙지만 플록시노시니힐리필리피케이션이야. 들어오라 해." "이런 무례를. 용서하시길." 나는 사과하는 노집사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사과는 알트에게 받아내도록 하지." 나는 문고리를 잡고, 온 힘을 다해 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나는 무례한 집주인에게 내가 보일 수 있는 최고의 항의를 다하기 위해, 고개를 뻣뻣이 치켜들고는 행진하는 군인의 심정으로 성큼성큼 응접실 안으로 행군했다. 흔들리는 샹들리에 아래에, 의자에 앉은 집주인은 그런 내 모습을 재밌다는 듯이 지켜봤다. "아, 필로. 나의 벗. 와줬구나." 아서 프랑크. 내 기억 속 모습과 전혀 변하지 않은 그는 거기 있었다. 나는 경악했다. 문자 그대로, 그는 변하지 않았다. 20년의 세월을 혼자만 빗겨간 것처럼. "이게 무슨...." "하하. 알아, 묻고 싶은 게 많겠지. 일단 앉아. 손님을 오래 서 있게 하고 싶진 않거든. 특히나...." 아서는 나의 의족을 보며 눈짓했다. 마침 발이 심하게 아파져 오던 참이었기에, 나는 군소리 없이 순순히 의자에 앉기로 했다. 내가 낑낑대며 의자를 앉는 것을 지켜보던 노집사가 손을 내밀었다. "지팡이는 받아 드리겠습니다." "됐네, 이건 내 다리야! 다리를 남에게 맡기는 사람을 봤나?" 그리고 나는 그 불쌍한 노인의 손을 거의 쳐낼 뻔했다. 그래, 인정한다. 나는 아주 무례했다. 분명한 과민반응이었다. 하지만 조금 생각해보라. 내가 이 저택에 도착한 이후로 본 수많은 기괴한 것들을. 호러 소설이었다면 작가의 과도한 장치에 한숨 쉴 정도였다. 그래, 이 정도 해놨으면 다음 페이지에는 괴물이 나오겠지. 살인 사건이 일어나거나. 아니면 둘 다 나오겠지. 기발하군. 괴물 저택에서 괴물이 나오다니. 아주 상상도 못했군그래. 그런데 지금 그 현장에 내가 있었다. 거기서 지팡이를 뺏어가겠다는 말은 마치... 그래, 인정한다. 나는 완전 쫄았다. "세상에, 필로, 그동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학구심에 불타던 순수하던 청년은 어디 가고 편협한 늙은이가 도착했지?" "살다 보면 일어날 수 있는 평범한 일들이 있었지." 나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오히려 너에게는 그 평범함이 부족했던 모양이군." "하하, 그래? 잘됐네. 나는 특별한 게 좋거든. 평범하다는 소리를 들었다면 못 참았을 거야." 아서는 내 말에 기뻐하며 웃었다. "그 말이 아니라... 대체, 자네는 20년간 나이를...." "그런 시시한 건 아무래도 좋으니까, 본론으로 들어가자." "시시하다니!" 아서는 내 항의를 무시했다.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마저 내가 기억하는 아서 프랑크 본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흥미 외의 것에 철저히 무관심했다. 예를 들어, 지난 20년간 나를 대한 방식처럼 말이다. 그는 품속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나는 그것을 보고 거의 비명을 질렀다. "있었잖나! 제대로 된 사진이!" "하하. 잘못 찍힌 쪽을 보내야 네가 올 거라 생각했거든. 너는 옛날부터 그랬잖아." 그것은 낮에 내가 받은 것과 비교해 훨씬 선명한 사진이었다. "너는 나를 너무 무시하는군!" "무시하는 게 아니야. 오히려 고평가하고 있어." 나는 항의를 위해 아서를 노려봤다.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내 눈을 마주보며 싱글거렸다. 아, 빌어먹을. 저 눈이다. 언제나 나를 사건에 말려들게 했던 그 눈이었다. "너 같은 사람은 드물어, 필로. 자신감을 가지라고." "너한테 듣기는 싫은 말인데." "물론 나는 최고로 특이한 사람이니까. 설마 나하고 견줄 생각이었던 거야?" 봐라, 잠깐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완전히 페이스를 빼앗기지 않나. 나는 억지로 사진 이야기로 화제를 되돌렸다. "그래서, 이건 뭐지? 무슨 동상처럼 보였는데?" "뭐라고 생각했는데?" "글쎄. 나는 사람 뒷모습이라고 생각했지. 팔과 다리가 있고, 앉아서 사색하는 그런 사람 말일세.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런데 내 가정부 마리는 그게 아니라더군. 사람을 묘사한 것치고는 머리 모양이 너무 이상하다고. 나는 그것도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지." 봐도봐도 기이한 사진에서 눈을 뗀 나는 무심코 아서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는 만면으로 불쾌를 표현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그토록 싫은 표정을 짓는 것을 좀처럼 본 기억이 없었다. 내 이야기 어디에 그를 불쾌하게 할 만한 표현이 있었단 말인가. "마리라고 했나?" "응? 아, 그래. 다리가 불편한 나 대신 집안일을 해주고 있어." "아주 나쁜 여자가 붙어 있었군그래. 돌아가면 당장 해고해. 가정부라면 내가 주선해 줄 테니까." "뭐?" 나는 화제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사진의 이야기를 하는가 했더니, 갑자기 가정부 얘기가 나오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래, 조금 더 순종적이고, 머리가 나쁘고,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 사람이 좋겠어." "무슨 말인가! 나는 관계를 소중히 하고 있어! 아무리 자네라도 내가 선택한 가정부를 쫓아내진 못할 거야!" "필로, 나는 진지해. 그녀는 너에게 아주 나쁜 영향을 주고 있어. 네 자유로운 상상력을 망치고 있다고! 사람이라고? 내게는 그런 대답이 필요하다고!" ───쿵! 아서는 불쾌한 듯이 으르렁거리며 책상 위에 무언가를 올려놨다. "대답해! 이게 뭐처럼 보이는지!"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었다. 사진에서 봤던 동상이었다. 크기는 눈대중으로 상하 11인치(*약 30cm). 재질은 청동이나 옥인가 싶으나 알기 어려웠다. 표면에는 푸른 빛이 감도나 싶더니, 각도에 따라 녹색 빛을 비췄다. 그것은 뒷모습만 보고 생각했던 것처럼, 턱을 괴고 앉아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크기에 비해 어설픈 조형으로 전체적으로 뭉툭하게 보였으나, 사진으로 볼 수 없던 세세한 디테일이 기분 나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내게 감흥을 줄 수 없었다. 동상이 테이블 위로 올라온 이후, 내 눈은 한 부분에 못 박힌 것처럼 고정되어 있었으니까. 머리. 거의 사람의 형태를 한 그것의 목 위에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형태의 머리가 얹혀져 있었다. 그래, 굳이 비유하자면, 두족류... 문어나, 그와 비슷한 족속의 것. 결국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망할, 크툴루잖아." 그것은 소설 속에 묘사된 크툴루 상과 같았다. 전툴루 관련\전툴루_02. 아서 프랑크의 기괴한 저택.jpg 03. 프랑크의 바보들 여기서 뇌내 독자 여러분께 살짝 민감할 수 있는 발언을 하나 하겠다. 감히 고백하건대, 나는 크툴루 신화를 싫어한다. 그리고 어쩌면 21세기에 여러 창작물을 즐기는 많은 사람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 믿는다. 왜냐고? 사실 나는 전생에 러브크래프트의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다. 읽어본 적 있다 수준이 아니라, 대부분 유명한 작품을 읽어봤으며, 그 중 일부는 내가 살던 대한민국에 번역되기 전에도 읽었다. 수많은 창작의 영감이 된 고전 호러의 명가에 조심스러운 존중마저 표하고 있었다. 하지만 창작자들의 언급이 쌓이고 쌓여, 어느 순간부터 폭발적으로 유명해진 이후부터 문제였다. 그 자체로는 아무 문제없던 신화적 존재들이, 전혀 크툴루 신화하고 관계가 없는 창작물에서도 갑자기 튀어나와서 깽판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 이유도 없이! 마치 창작자가 그래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어느 샌가 공포의 대상이었던 작중 이형의 신들은 판타지 배틀물의 전투력 측정기가 되서, *짱쎈* 괴물의 대명사쯤 되어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런 세태에 염증마저 느끼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크툴루 신화를 싫어했다. 러브크래프트 특유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즐겼지만, 그것의 판타지적 해석은 여전히 내 관심사 밖이었다. 아, 그래. 그렇다고 정통파 크툴루 소설 속에 들어오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었는데 말이지. "크툴루." 아서는 내가 직전에 한 말을 따라 읊었다. "흐쑬루, 크흘루? 크툴루. 이상한 어감이군. 발음하는 법도 모르겠어. 재밌어. 그게 네 감상이야?" 직전의 격분이 거짓말처럼 언제나처럼 즐거운 표정으로 돌아온 아서가 물었다. 그가 발음을 혼동하는 이유는, 순전히 내 발음의 문제였다. 전생에만 존재하던 개념을 마주한 나는 무심코 한국어를 말하듯이 음절을 끊어 발음했고, 아서는 그 점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면, 이 동상이 뭘 묘사한 건지 알고 있었다든지." 나는 잠시 내 어리석음을 저주했다. 나는 지난 40년간 내가 전생자라는 사실을 철저히 숨겨왔다. 거기에는 네 가지 지당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런던에서 미친놈 취급을 받고 정신병원에 들어가면 머리에 구멍이 뚫리기 때문이다. 문자 그대로, 뇌를 절단한다. 그 수술 장면을 한 번이라도 봤다면, 런던에서 입을 조심하게 되기 마련이다. 둘째, 알려서 좋을 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내 두 번째 고향을 욕보이고 싶진 않지만 런던은 무정한 도시다. 명성이 아닌 유명세는 어떤 의미로건 독이 되기 마련이었다. 셋째, 내가 정말로 미래에서 왔는지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역사에 대해 잘 아는 편은 아니지만, 몇 가지 사실은 알고 있다. 1895년에 죽었어야 하는 다윈은 멀쩡히 살아있고, 이제 막 병역을 마쳤을 아문센은 벌써 남극해를 여행하고 있었다. 거기다, 암흑 대륙이라니? 무슨 판타지 소설도 아니고. 그리고 대망의 네 번째 이유. 나는 눈앞의 상대를 노려봤다. 네 번째 이유께서는 동상의 머리를 툭툭 건드리며 히죽거렸다. 그래, 진짜 이 녀석한테만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잘 기억나지 않는군. 아마 해외에서 봤겠지. 여러 곳을 다녔으니." "아, 좋아. 마침 이것도 해외에서 왔거든." 내 어설픈 능청에 그는 즐거운 표정으로 감탄했다. "내 선친께서 반세기도 전에 암흑 대륙에서 발견한 물건이지. 그분은 어떤 열정에선지 이것의 정체를 밝혀내기로 마음먹고 평생을 수소문하셨지." 나는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아, 선방했다. 암흑 대륙이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다. 아서 같은 영국 토박이는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교묘하게 속여넘길 자신이 있었다. "그래, 그러고 보니 암흑 대륙이었던 것 같군." "선친께선 이 동상이 어디서 왔는지 알아내기 위해, 동상을 한 탐험가에게 맡겼지. 암흑 대륙을 횡단하고자 하는 뜻이 일치했기에, 그는 기꺼이 선친의 지원을 받기로 하고 암흑 대륙으로 떠났지." 아서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마음 한켠에서부터 불안감이 스멀스멀 잠식했다. 불안감의 출처는 명확했다. 일찍이 설명한 바가 있지만, 암흑 대륙은 19세기 현대에는 미지의 영역이었다. 얼마나 세상이 아프리카에 무관심 했으면, 희망봉의 초라한 케이프 시티를 넘어서는 측량조차 완성되지 않은 그런 시대란 말이다. 그런 세상에 암흑 대륙 전역을 횡단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인물을 많이 알지 못했다. ...아니, 딱 한 명 알았다. 그것도 아주아주 유명한 사람으로. "설마 리빙스턴 박사 말인가?" 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탐험가의 이름은 데이비드 리빙스턴. 암흑 대륙 횡단하고 돌아온 그는 도리어 미궁에 빠졌지. 그런데 자네는 보자마자 이름까지 맞춰버렸군. 인상적이야." 물렸다. 어떤 일에도 재능을 보이던 아서였지만, 그중에서도 그는 한 가지 특출난 재능을 가졌다. 그는 아주 뛰어난 변사였고, 무의미해 보이던 짧은 잡담조차 복선이 되어 청자를 잡아먹었다. 그리고 나는 마치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멋들어지게 상대의 노림수에 걸려준 것이다. 아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대단한 리빙스턴 박사도 알아내지 못할 걸, 네가 어떻게 알아냈지?' 우연히 봤다는 말은 이제 통하지 않겠지. 리빙스턴 박사는 암흑 대륙에 있어서 고작 4년 반짝 탐험가인 나보다 훨씬 저명한 인물이니까. 이것이 빅토리아 시대의 부조리였다. 교과서에서밖에 본 적 없는 번쩍거리는 위인들이 한 두 다리만 건너가면 죄다 아는 사람이 되는 거다. 나는 대답을 망설였다. 마치 뱀 앞의 개구리가 마비되듯이, 어줍잖은 변명을 해봐야 아서에게 잡아먹힐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잠깐 어색한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아서는 그 정적에서 무슨 대답을 얻었는지, 더 추궁하는 대신 책상 위에 한 덩어리의 종이 뭉치를 올려놓았다. 종이가 들썩이며 사이사이 쌓였던 먼지가 쏟아져 나왔다. "콜록콜록...! 세상에, 이게 다 무슨 난리인가?" "나는 동상을 받아보자마자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기더군. 이건 뭐로 만들었을까? 청동? 은? 아니면 옥인가? 적어도 지금껏 봤던 어떤 광석과도 다르단 것만은 직감적으로 알았지." 나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랬다. 나도 이것을 보자마자 기이한 빛깔을 가진 이상한 재질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저 그 형태에 압도되어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 뿐. "그래서 나는 동상을 잘라내서 왕립 학회에 성분 분석을 의뢰했지." "뭐?!" 아서의 당돌한 선언에 나는 펄쩍 뛰며 소리 질렀다. "세상에, 알트!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가!" 나는 동상을 들어 올렸다. 생각보다 무거워 애를 먹었다. 동상을 빙빙 돌리던 나는 발톱인지 발가락인지 모를 길쭉한 부위에서 부자연스러운 단면을 발견했다.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 아주 최근에 잘려나간 흔적이었다. "이걸 무식하게 통으로 잘라낸 건가? 하다못해 깎을 수라도 있지 않나!" "무슨 시시한 얘기를 하나 했더니... 필로, 너까지 바보 같은 소리 하기야? 19세기는 화학의 시대야. 선친께서야 그런 방법을 택할 수 없었다고 해도, 우리는 현대인답게 과학적으로 접근해야지." 아서는 당황한 내가 바보처럼 보일 정도로 태연했다. 아니, 오히려 내 *어리석은* 항의에 볼멘소리를 내며 불만을 표했다. 나는 다시금 21세기와 19세기의 상식이 얼마나 다른지 재인식하게 되었다. 여기는 19세기. 문화재를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궤멸적으로 부족한 시대였다. 사학적 가치를 측정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문화재가 수집가에게 헐값에 팔린다든지, 학구적인 이유로 문화재를 훼손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내가 여기서 21세기의 상식으로 아서의 *지적인* 방식을 따지고 들면, 그는 나를 아주 교양 없는 사람으로 취급할 것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초조함을 다 없앨 수 없었다.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문제는 동상이다. 크툴루가 아닌가? 그것이 정말로 실존한다면, 이 동상 또한 어떤 마력을 지니고 있을 터다. 나는 아서의 경솔한 행동이 어떤 저주를 불러올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내 걱정도 모르고, 아서는 내가 별말을 하지 않자 순응했다고 생각했는지 기분이 좋아져, 희희낙락 분석표를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나는 마지 못해 그 중 한 장을 집어들었다. 왕립 학회 인장이 찍힌 번드르르한 문서였다. 잠깐 내 소개를 다시 하자. 나는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했으며, 학문을 통한 것은 아니었지만 학위 위원회를 통해 정식으로 박사 학위를 인정받기도 했다. 거기다 21세기의 지식을 가진 이점으로 몇몇 분야에 한해서는 현대 최고의 전문가들보다 앞선다고 말할 수 있었다. 자랑은 아니지만, 19세기 현대 기준으로 나는 대단한 식자층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건, 내가 무식한 게 아니라 이 표의 작성자가 불친절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변명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그런데 어떤 결과가 나왔는지 알아?" 아서는 알아보지 못할 전문용어로 씨름하는 나에게 성분 분석이 적힌 표를 내밀었다. "45%의 백금, 23%의 철, 그리고 0.5%의... 텔루륨? 이건 도무지 뭔지 모르겠군." "중요한 건 거기가 아니야. 더 읽어봐." 나는 몇 가지 이름만 들어본 원소 성분을 더 발음했다. 그리고 그 끝에 도착하니, 복잡한 화학 용어 대신에 구구절절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나는 소리 내어 읽었다. "당 왕립 학회는 이하 3개의 원소가 지금껏 지구상에서 발견된 어떤 것과도 다르다는 것을 확신한다. 허나 샘플이 부족하여 상세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아, 학회에서는 과학과 인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동상 전체의 기증을 희망한다...?" 나는 슬쩍 아서를 올려다봤다. 그는 보란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어때?" "미친놈들." 아서는 내 외마디 욕설에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동상을 보내지 않을 거야." "당연하지!" 아서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사람 특유의 수줍은 미소를 보이며 말을 고쳤다. "아니, 내 말은 보내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거였어." ───드륵! 아서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른 분석표를 읽어볼 생각으로 집어든 나는 그의 돌발 행동에 멀뚱멀뚱 눈을 껌뻑였다. 그는 동상을 품에 끌어안고 말했다. "가자, 보여줄 게 있어." "뭐? 잠깐!" 나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 한쪽이 없는 사람에게 그의 템포를 맞춘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서는 내 쪽을 한 번도 돌아보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로 나갔다. 나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열심히 절뚝거리며 그 뒤를 쫓았다. ───삐걱 삐걱. ───끼익 끼익. 물을 먹어 여지없이 썩어 있는 나무 복도가 걸을 때마다 귀를 간지럽히는 비명을 질러댔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발이 빠지지 않을까 연신 조심하는데, 아서는 익숙한 것처럼 오히려 쿵쿵 걸어댔다. "돈도 많을 텐데 복도라도 좀 수선하는 게 어떤가?" "물어보고 싶은 게 제법 있었을 거야. 아마 궁금하겠지. 20년 전과 비교해 저택은 어째서 이렇게 변했는가. 다른 사용인들은 어디로 갔고, 저 기이한 외모의 집사는 누구인가. 내가 어떤 경위로 이 동상을 물려받게 되었는가. 내 십 년 연구는 대체 무엇인가." 말을 듣는 시늉조차 하지 않는 아서의 태도에는 신물이 났지만, 하나씩 말하는 것들이 너무 흥미로운 것들이라 나는 불평조차 하지 못한 채,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리고, 나는 어째서 늙지 않았는가." 나는 두 가지 점에 놀랐다. 첫째는 자신이 늙지 않았다는 자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었고, 둘째는 내 궁금증을 그토록 잘 이해하면서도 지금까지 모른 척하고 있던 그의 뻔뻔함에 대해서였다. "하지만 그 모든 설명은 조금 뒤로 미뤄두자고. 모든 일에는 순서가 있기 마련이니까. 안 그래?" 나는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지만, 지금쯤 아서가 히죽거리고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는 아무래도 뛰어난 변사였으니까 말이다. 모든 변사는 청자가 안달 날 수록 신이 나는 법이었다.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그래, 모든 것은 한 통의 편지에서 시작되었다. 나의 선친의 부고를 담은 편지였지." 그는 머나먼 과거를 회고하는 것처럼 독백했다. 하지만 나는 프랑크 백작의 첫 기일이 아직 지나지 않은 것을 알았다. "선친이 타계한 후에, 초대한 적 없는 무례한 손님이 한 명 방문했지. 보험 조사원이었어. 그는 심지어 경찰이랑 변호사보다도 이틀이나 먼저 저택에 방문했지. 그는 선친의 죽음과 우리 가문의 재산에 하나라도 꼬투리 잡을 것이 있는지 꼼꼼히 조사했어. 새벽 벽두부터 가로등 심지가 꺼질 때까지, 내리 일주일을 그리했으니 그 정성이 보통 대단한 게 아니었지. 그래서 그가 결국 뭘 찾았을 거라 생각해?" 나는 한참 이야기가 흥미로워지자 어김없이 말을 끊는 아서의 화법에 심통 나서 비아냥거렸다. "글쎄, 널 놀라게 하려면 여간 비싼 게 아니면 안될 텐데. 또 다른 상속권자라도 찾았나?" "...." 아서는 잠깐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더니, 잠시 후 히스테릭하게 웃었다. "내 쌍둥이 형이야. 정말 누구도 몰랐지. 이 저택에 그런 비밀 지하실이 있을 줄도, 그리고 지난 40년 동안 학대당한 형이 있을 줄도 말이야. 대단해, 필로, 정말 대단해." 나는 발을 멈췄다. 아서는 조금 더 걷다가 따라 멈췄다. 그는 몸을 돌려 내 쪽으로 향했다. "우리 가문은 저주받았어. 필로, 나는 저주받은 거야." 아서는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는 내 어깨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이 이야기는 다음에마저 하지. 보다시피 선친의 광기와 아집은 우리 가문의 대들보부터 나사못 하나에까지 배어 있지. 그 저주의 근원을 밝혀내는 것이야말로 내 소명이 된 거야. 운 좋게도 내 수중에는 선친이 남긴 막대한 재산이 있었고, 또 다행히도 요즘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은 없지 않나? 나는 방법을 모색했지." 아서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조금 전보다 더 느린 걸음이었기에 따라가기 힘들진 않았다. 믿기 어려웠지만, 나는 그가 나를 배려하고 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혹시 일간지도 보나?" "데일리 텔레그래프에 실린 그 고약한 장난 말인가?" "프랑크의 바보들이라 하더군. 마음에 들어.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마침내 내 마음에 드는 일을 해냈어." 뜬금없는 화제였다. 나는 아서의 눈치를 살폈다. 갑자기 그가 이런 화제를 꺼내는 의도는 뭘까. 아서를 모르는 자는 그가 아주 충동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때때로 보여주는 치밀한 면모는 결코 간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너다운 장난은 아니었지." "어째서?" 그는 기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정답을 잘 찾아가고 있다는 신호였다. "유머가 없어." 나는 짧게 일축했다. 실제로 그랬다. 이건 아서 프랑크의 방식이 아니었다. 만약에 그가 이름난 명사들이 얼마나 무식한지 까발리고 싶었다면, 그들의 전문 분야에서 깔아뭉갰어야 했다. 가짜로 초대해놓고 문을 걸어 잠그는 건, 세살배기 어린애도 할 수 있는 억지에 불과했다. "그러면 이 농담에 유머를 부여하려면 뭘 더해야 할까?" 유머를 더한다고? 나는 아서가 주는 이 골치 아픈 수수께끼를 풀어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프랑크의 바보들. 피해자들은 이번 소동을 유치한 장난으로 치부하고 아서를 욕보여 명예를 회복할 것이다. 그런 그들이 알게 되면, 세상에 알려지면 가장 수치스러울만한 것은 뭘까? 실제로 그들이 무지했다는 걸 까발리는 거겠지. 저택을 들어갈 방법은 따로 있었고, 그들이 찾지 못한 것에 불과하다고. 애초에 그들은 뭣 때문에 초대됐다고 했더라? 프랑크 가문이 주도하는 학술회? "그거였군, 그거였어. 입구에서 그 바보 같은 장난마저 테스트였나?" 내 표정을 보고 대답을 짐작한 아서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바보라는 말이 좋아. 미지란 언제나 납득할 줄 모르는 바보들이 파헤쳐 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자신을 똑똑하다고 착각하는 진짜 바보가 섞이면 곤란하지. 나도 나름대로 거름망을 만든 셈이지." 아서는 벽면의 촛대를 손으로 잡고 아래로 꺾었다. 아, 이런 동작, 고전 영화에서 꽤 많이 봤는데. 예를 들어서, ───달칵. 그래, 비밀 방이라던가. 하얀 벽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사람 한 명 간신히 지날 법한 좁은 길이 열렸다. 어두운 통로 너머로 따뜻한 바람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어서와, 필로. 프랑크 학술회는 실존해." 아서는 비밀을 고백하는 아이처럼 수줍게 웃었다. 04. 태엽 장치의 신 ───뚜벅 뚜벅. 어두운 지하실 계단에 두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밖에서 보인 것처럼, 통로는 한 사람 간신히 지날 만큼 좁았고 그 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땅을 다지는 것만 족히 수년은 걸렸을 대공사였을 것이다. 가족 중 누구도 알지 못했다고 하니, 얼마나 오래된 유적일지 나는 쉬이 가늠할 수 없었다. 50년? 100년? 벽면의 곰팡이마저 말라 비틀어져 과거의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그리 생각하고 있자니, 뒤에서 아서가 불평을 내뱉었다. "필로, 겁낼 거 없어, 뛰라고!" "내 다리를 보고 좀 말하지 그러나?!" 왼쪽 다리를 잃은 이후로 층계는 언제나 내 가장 큰 적이었다. 명목상 의족은 막대에 끼워놓은 나무쪼가리에 불과했고, 성인 남성 평균에 근접한 내 체중조차 온전히 버텨내질 못했다. 원래 살던 다락방을 떠난 것도 삶의 질을 높여보자는 생각도 있었지만, 도무지 이놈의 다리로 계단을 오르내리며 외출할 마음이 들지 않았던 이유도 컸던 것이다. "대체 아래에는 뭐가 있길래 이렇게 더운 건가?" 나는 벽에 몸을 기대고는 품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이마를 쓸어냈다. 한 번에 축축해진 손수건을 어디 넣기도 애매해서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뭐일 거 같아?" 불안한 사람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뒤에서는 시종일관 장난스러운 말투로 쿡쿡 찔러대니 미칠 지경이었다. 뭐냐고? 당연히 모르지. 19세기의 나라면 말이다. 21세기의 기준으로 물어본다면, 이건 미스테리도 뭣도 아니었다. 그냥 평범한 난방실이겠지! 나는 신경질적으로 답했다. "보일러!" 사실 이 대답은 여기가 19세기 영국이란 걸 감안하면 넌센스였다. 21세기 현대인이 상상하는 지하 보일러실이 등장하기에는 아직 한참 일렀다. 10년 전에 에디슨이 라디에이터를 발명하긴 했지만, 그것조차 지하에 대형 보일러를 놓는 것과는 많이 달랐다. 나는 다시 한 걸음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놈의 지하는 빙빙 돌며 얼마나 깊은지, 족히 2개 층은 내려온 듯했다. 나는 문득 시끄럽던 아서가 조용해졌다는 걸 깨닫고 불안해져 말을 걸었다. "알트? 거기 있나?" "아, 미안. 잠깐 생각하느라." 그답지 않은 대답이었다. 갑자기 사색에 빠지다니. 외모야 어떻건 그도 나이를 먹긴 한 것일까. 어쨌거나 나로서는 그가 얌전해진 것이 마음에 들었기에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아서가 조용해지자 다른 곳이 난리였다. 이제는 지하와 어울리지 않는 소란스러운 기차 소리가 들렸다. 아니, 굳이 말하면 군대 행군 소리가 더 비슷할지도 모른다. 여하튼, 뭐가 됐건 이런 지하에 있으리라곤 생각되지 않는 우렁차고 규칙적인 소음이었다. 아서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묵묵히 계단을 더 내려가자 계단이 끊겼다. 막다른 길이었다. 계단 위에서도 길을 잃을 수 있나, 나는 당황한 나머지 벽에서 손잡이를 찾았다. 유감스럽게도 벽은 그저 벽이었다. "알트?" "문 앞에 서봐." 문? 그건 문이라기보다 벽이었다. 나는 아서가 시키는대로 순순히 문 앞에 바로 섰다. 그러자, 발치가 움푹 꺼지는 느낌이 들더니 달칵, 하는 격발음이 들렸다. 나는 직감적으로 내가 커다란 스위치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드르르륵.... "자동문이군." 나는 솔직히 감탄하며 중얼였다. 압력을 이용한 원시적인 자동문이었다. 원리를 알기 힘든 저택의 정문만은 못했지만, 이것도 19세기의 기술력을 생각하면 제법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아이디어를 구현하려 한 아서에게 놀랐다. 평생 그의 이런 기술자적인 면모를 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내려다 보는 시선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21세기 첨단 문명을 기억하는 나로서는, 19세기의 기술 발전에 감탄하더라도 진심으로 놀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뭐가 나와도 뻔하고 예측되어, '아, 이제 이게 나왔구나?'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단적인 예로, 작년 말 집 앞에 자동으로 점등되는 전기 가로등이 설치되었는데, 호들갑 떠는 마리에게 나는 "아, 그렇군."하고 짧게 대답하고 말아 공분을 샀던 일이 있었다. 나에게 19세기의 발명이란 그런 것이었다. 반면 아서는 내 혼잣말조차 지나치지 않았다. "자동문이라." 나는 아서가 내 말을 따라하는 순간을 싫어했다. 그는 항상 날 그런 방식으로 긴장시켰다. "지금까지 부르던 가압반응형 수평작동 장치보다는 훨씬 낫군그래." "농담이겠지?" "학술회에 초청받은 작가는 아직 없어서 말이야. 다들 누가 더 어렵게 말하나 경연하러 온 사람 같다니까." 나는 내 말실수를 알아챘다. 전생자만이 할 수 있는 말실수였다. 자동문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직관적이더라도, 자동문이 보급되지 않은 시대에는 존재할 리가 없는 단어였다. 시제품에 불과한 그것의 상호명을 곧바로 작명하는 건 역시 어색한 일이었다. 감이 좋은 아서는 그 어색한 부분을 바로 잡아낸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이 실수가 심각한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 생각하며 반성했다. 문 틈이 갈라지며 안쪽에서 강한 빛이 새어나오기 시작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는 너무 자극적이라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등뒤에서 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보일러라고 했지? 그건 반쯤 정답이야." "뭐?" 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내 어깨를 비집고 열린 문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 "이봐!" "필로, 우리 가문이 항상 부유했던 것은 아니었어. 이런 막대한 부를 축적하게 된 건, 선친의 대에 이르러서야. 그는 선구안을 지닌 사업가로 불렸지만, 나는 그가 그런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지." 내 항의를 사뿐히 무시하며 아서는 언제나처럼 태연히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가 평소와 다르단 느낌을 받았다. 평소처럼 즉흥에서 짜내는 언변이 아니라, 준비된 대사를 읽는 것처럼 딱딱한 어투였기 때문이다. "그자는 아주 끔찍한 경제관념을 지니고 있었거든. 장담컨대, 돌멩이와 다이아몬드 중 더 가치 있는 것도 구분하지 못할 자였어. 나는 그런 자가 어떻게 사업적 성공을 거뒀는지 늘 궁금했어." 아서는 빛을 등진 채, 내 쪽을 돌아봤다. 내 눈은 빛에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그의 사후에 알게 되었지만, 예상대로 선친께서는 어떤 선구안도 가지지 않았어. 감각 같은 것도 필요 없었지. 그저 그의 곁에 있는 예언자에게 어디에 어떤 공장을 세우면 되는지 물어보면 됐으니까." 아서는 어떤 거대한 물체 위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것이야말로 광원의 정체였다. 수십, 어쩌면 수백에 달하는 백열전구가 일제히 번쩍였다. 태양조차 이보다 밝을 순 없었다. "소개하지. 실존하는 유일한 예언자. 우리는 오라클이라 부르고 있지." 그것은 웅크린 괴물이었다. 셀 수 없이 많은 관절이 잠깐도 멈추지 않고 묵묵히 축 운동을 반복하며, 크고 작은 톱니바퀴가 교합을 이루며 그때마다 군홧발 소리처럼 규칙적인 소음을 만들었다. 족히 십 수 미터는 이어진 거체는 좁지 않은 지하실 벽면을 뒤덮고 있었다. 그 끝에 연결된 것은 열차에나 쓰일 법한 거대한 증기기관으로, 자욱한 증기가 쉴 새 없이 뿜어져 천장을 타고 올라갔다. 나는 노집사의 말을 이해했다. 저 증기가 항상 복도에 스며드는 한, 보수는 해봤자 의미가 없을 터였다. "정식 명칭은 해석기관, 찰스 배비지라는 수학자의 몽상 속에서 탄생했다더군. 선친께서는 그의 후원자를 자처하고 이 강철 괴물을 현실로 구현한 거야." 아서는 천천히 기계를 돌아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나? 이토록 거대한 지하실을 만들고 그 아래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태엽장치를 숨겨놓았으며, 열차에나 쓰일 법한 증기기관과 산더미 같은 석탄을 쌓아놓는데 얼마나 많은 자금이 필요했을까? 백만 파운드? 이백만 파운드? 그 자금은 다 어디서 나왔지?" 아서의 몸이 휙 돌아갔다. 후광이 강한 탓에 그의 얼굴이 있어야 할 장소에는 짙고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그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이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우리는 이제 막 지구의 음지에 발을 들인 거야." 잠시 적막이 감돌았다. 하지만 고요함은 없었다. 기계장치는 한시도 쉬지 않고 자신의 존재를 시끄럽게 각인시켰다. 다시 말을 시작한 것은 아서였다. "예언자 같은 거창한 이름을 짓긴 했지만, 쉽게 설명하면 이건 그저 계산기야. 대신 연산 결과를 저장하고 출력할 수 있지. 단지 그뿐이야." 그리고 아서는 말을 멈췄다. 다분히 의도된 침묵이었다. 그는 그 보잘것없음을 강조하여, 내 호기심을 유발하려는 속셈이 뻔했다. 여전히 짓궂은 화법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 수작도 통하지 않았다. 우선 나는 이와 같은 물건을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아주 비슷한 형태로 완성된 것을 사진 속에서 본 적이 있었다. 19세기가 아닌 21세기에서 말이다. 사진 속의 물건은 오라클이나 해석기관으로 부르는 대신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에니악(ENIAC). 반세기 후에 등장할 최초의 컴퓨터. 오라클은 그것과 아주 닮아 있었다. 나는 천천히 오라클을 향해 다가갔다.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각종 부품의 연식이 그리 짧아 보이진 않았다. 철이 이런 색을 띠려면 최소 수십 년은 산화되어야 했다. 나는 이것이 얼마나 오래전부터 존재했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감탄 같은 건 없었다. 옛 기술이기 때문에? 아니. 나는 오롯이 순수한 공포를 느꼈다. 이것은 이 시대에 존재해서는 안 되는 기술이다. 운이 좋았다든가, 우연이라든가 하는 변명이 통용되는 수준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있었지? 50년? 그러면 100년 일찍 완성된 건가? 뭘 위해서? 그동안 뭘 연산했지? 아서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대단한 물건이 수십 년간 명세표나 뽑아내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실존 여부조차 알 수 없는 고대 신 따위보다, 이 낡은 기계장치가 나에겐 더욱 큰 공포였다. 아니, 이것이야말로 이미 만들어진 신이었다. "기계 장치의 신...." "아니." 내 짧은 탄식을, 아서는 기쁜 듯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신조차 알지 못하는 미래를 예측하니, 인간이야말로 진정 신이라 불러야겠지." 그 순간, 나는 아서에게서 인간이 아닌 이형의 존재를 보았다. 나는 애써 환시를 떨쳐냈다. 아서의 비현실적인 망상에 너무 시달린 탓이다. 나는 조금 더 현실적인 생각을 할 필요가 있었다. 구체적으로, 아서의 의도 같은 것 말이다. 그는 많은 말을 했지만, 여전히 무엇도 말해주지 않고 있었다. 학술회란 뭔지, 그의 연구란 뭔지, 심지어 나에게 뭘 바라는지조차 말이다. "...그래서, 보여주고 싶다고 했던 건 이건가?" 직전까지의 열기가 거짓말처럼, 내 입에서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이것도, 보여주고 싶었지. 좀 더 중요한 건 더 안쪽에 있지. 그 전에, 사실은 학술회의 회원도 소개해주고 싶지만." 아서는 사뿐히 오라클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뜨거운 기계에 붙어 있었던 탓에 비라도 맞은 것처럼 축축히 젖어 있어서 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출석률이 저조해. 다행히 한 명은 소개해줄 수 있겠군." 그의 시선 끝에는 한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뭐가 그리 바쁜지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심지어 한참을 떠든 우리조차 눈치채지 못한 듯하니, 대단한 집중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나와 아서는 천천히 여인을 향해 다가갔다. "아, 프랑크 회장님." 아서를 알아본 여인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영어로 말하고 있지만 어색한 부분이 많았다. 외국인, 아마도 러시아 계통인가? 러시아 어라면 몇 마디 할 줄 알았다. "회장님, 이쪽 분은?" 다행히 내가 굳이 서툰 러시아 어를 쓸 필요는 없었다. 여인의 발음은 서툴렀지만, 말 자체는 아주 능숙해 보였다. 그녀는 아주 조심스럽게 격식을 갖춰 나에 대해 물었다. 사실 그 점은 어쩔 수 없었다. 얼추 보아도 여인과 나는 최소 10살 이상 차이 나 보였으니까. 오히려 내가 가르치는 대학생이라고 생각하는 게 어울리는 외견이었다. 거기다 기이할 정도로 어린 외모인 아서까지 함께 있으니 내 존재가 너무 어색하게 느껴졌다. 구체적으로 말해서, 젊은이 사이에 주책 맞게 끼어든 늙다리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지. "아서, 이쪽 여성 분은?" 나는 말투를 정돈해 진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초면의 여인 앞에서 애들처럼 서로 애칭이나 불러댈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다행히 아서 역시 그 정도 교양은 갖췄는지 진중한 말투로 응했다. "혹시 아까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나? 왕립 학회로 동상을 보내는 일은 없을 거라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겠군. 아서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만 보이게 윙크했다. ...뭐? 어쩌라고? 나는 불길함에 미간을 확 좁혔다. 그는 여인을 향해 몸을 돌리더니 아주 격조 있는 동작으로 나를 가리켰다. "부인, 이쪽은 저명한 플록시노시니힐리필리피케이션 남작이라네." "아! 플록, ...네?" 아서는 여전히 교양이 없었다. 그리고 잠깐이라도 그를 신뢰한 나는 끔찍한 바보였다. 나는 오해가 쌓이기 전에 서둘러 정정했다. "필레몬 허버트, 허버트라네. 방금 멍청이는 무시하게." "그건 신사답지 않은 말투인데." "닥치게나." 나는 내가 표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 것에 감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쯤 얼굴이 새빨갰을테니 말이다. 마치 내가 아서와 이런 유치한 장난을 짜기라도 한 것 같지 않나. 짠 것은 맞지만, 그건 20년 전 일이다! 아서는 무슨 일 있었냐는 듯이 뻔뻔하게 여인을 소개했다. "그리고 필레몬, 이쪽은 여인은, 마리 스크워도프스카 퀴리. 프랑스에서 온 물리 지질학자라네." "마리 스워도프스카 퀴리, 잘 부탁...." 나는 악수를 위해 손을 내밀다 우뚝 멈춰 섰다. "지금 뭐라고, 퀴리라고?" "오, 알고 있었나. 그녀가 바로 피에르 퀴리의 피앙세였다네. 경사스럽게도 올해로 퀴리가 되었지." 나는 멍청하게 말을 되풀이했다. "뭐라고, 퀴리 부인이라고?" 05. 썩은 어머니 퀴리 부인. 폴로늄과 라듐의 발견자이자, 방사능 연구의 선구자. 화학에 전기 분해라는 패러다임을 제시한 위대한 여성 과학자의 대명사. 그런 여인이 내 앞에 있었다. 나보다 족히 10살은 어린 연구자 신분으로. "혹시 「민족과 운명」과 「반지성의 시대」를 집필하신 허버트 박사님이신가요?" 내가 입을 꾹 다문 채, 상대를 노려보고 있자, 여인... 그러니까, 평생 이런 표현을 쓰게 될 줄은 몰랐지만, 퀴리가 먼저 말을 걸었다. "그렇네만. 혹시 읽어봤나?" 나는 설마 그녀의 입에 내 책의 이름이 나올 줄 몰랐기에 깜짝 놀랐다. 그녀는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책상 서랍을 뒤져서 책 한 권을 꺼냈다. 그것은 분명히 내가 쓴 책의 프랑스어 판본이었다. "정말 감명받았습니다!" 나는 정말로 큰 혼란을 느꼈다. 지금까지 언제나 본받아야 할 위인으로 여겼던 그녀와 내 관계가 실제론 정반대라는 사실이 와 닿은 것이다. 그녀에게 나는 실적을 가진 학자였고, 반대로 나에게 그녀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새내기 연구생이었다. "용케 구했군." 나는 고소를 머금었다. 역사적 위인에게 감명을 준 책을 썼다는 자부심은 없었다. 언젠가 설명할 기회가 있겠지만, 그 두 권의 책은 내 인생의 흑역사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몇몇 젊은 학생들이 그 책을 들고 와 내게 존경을 표할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심지어 그것이 퀴리 부인이니 더욱더 말이다. "사실은, 처음에는 피에르 퀴리를 초청했네."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아서가 드물게도 변명하듯 말했다. "네, 하지만 그이는 지금... 여긴 없네요. 프랑스 연구소를 떠나고 싶지 않아 해서요. 어렵게 구한 기회니까요." "이해하네." "그리고 또, 베크렐 교수님도 제 연구 건으로 협력해주고 계셔서요. 남는다면 그분과 제가 남을 수는 없었던지라." "그렇지. 둘 다 내팽개치고 올 수는 없었겠지." 아서와 퀴리는 짠 듯이 말을 주고받았다. 나는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했다. 내가 전생에 아주 잘 알던 과거의 위인과, 현생의 아주 잘 알던 친구가 대화하는 장면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진 탓이었다. "피에르 퀴리는 초청을 거절하며 자신의 아내를 대신 추천했지. 나중에 안 사실이었지만, 그가 지금 하고 있는 연구도 부인께서 시작한 연구였다더군." "그이와 베크렐 교수님이 많이 도와주셨죠." "아무튼, 그녀와 만나본 나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지. 학회에 이름만 걸어놓은 멍청이들은 눈치채지도 못한 테스트를 통과했으니 말이지." 아서는 누가 봐도 알 정도로 퀴리를 띄워 주고 있었다. 나는 그가 남을 이토록 칭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놀랍지는 않았다. 바로 그 퀴리 부인이 아닌가. 이런 젊은 나이부터 두각을 드러내다니. 역시 대단하다. "그러면 우리는 조금 바빠서. 아, 이건 얘기했던 동상일세." "아, 네, 감사합니다." 아서는 어색할 정도로 서둘러 말을 끊었다. 그는 퀴리의 인사가 끝나기도 전에 걷기 시작했다. 퀴리 부인 같은 인물을 언제 또 만날 수 있을지 몰랐기에, 나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아서의 뒤를 쫓았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업적을 세우는 것은 몇 년 뒤의 일이니, 지금 내가 그녀를 아는 척하는 것은 굉장히 이상해 보일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더니, 아서가 걸음을 늦추며 뒤따르던 나에게 몸을 바짝 붙였다. "이봐, 필로, 정말 그러기야?" "뭐? 뭐가 말인가?" "아무리 못 미덥게 생각하더라도, 그녀는 내 손님이야! 자네는 나한테 망신을 주는군!" 아서의 속삭임에 나는 놀라며 부정했다. "내가? 퀴리 부인을? 말도 안 돼!" 나는 아서와 퀴리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아서는 일부러 들려주듯이 퀴리를 칭찬했고, 퀴리는 계속해 누군가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바로 나였다! "설마 내가 그녀가 여자라는 이유로 무시했다고 생각한 건가?" "아니었나?" "당연하지!" 이 또한 시대의 차이였다. 19세기 여성은 차별의 대상이었지만, 특히나 과학계는 정도가 유별났다. 내 고국인 영국 역시 마찬가지로 왕립 학회는 여성 회원을 인정하지 않았고, 내 모교인 케임브리지 역시 여성에게 학위 수여를 거부했다. 여성의 두뇌가 과학을 할 만큼 발달하지 않았다는 트집 같은 이유였다. "그건 절대로 아니야. 그녀는 대단한 사람이야." 하지만 21세기 사람이라면, 아니, 당장 퀴리 부인의 일생을 아는 자라면 누구라도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생각인지 알 것이다. 그녀는 누구보다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그녀가 대단하다니?" 그랬더니, 이번에는 아서가 반대로 말꼬리를 물었다. "자네가 만든 테스트를 통과했다며." "무슨 테스트였는지도 모르면서 어떻게 단언할 수 있어?" 나는 아서를 멀뚱히 쳐다봤다. 이게 미쳤나. 갑자기 그는 퀴리를 부정하고, 내가 옹호하는 쪽으로 바뀐 것이었다. "이유로 말하자면 나는 네 안목을 믿고, 내 안목도 믿는다는 거지. 둘 다 그녀가 훌륭한 사람이라고 동의했으니 그런 거겠지." 나는 속으로 불평하면서도 최대한 말꼬리를 물리지 않게 이야기를 수습했다. 어중간하게 그의 신경을 자극해봐야 내 손해였다. 기분 나쁜 아서는 문자 그대로 무슨 짓을 할 줄 몰랐다. 그랬더니, 아서는 반대로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그렇단 말이지." 사람을 지독히 불안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나는 내 착각 하나를 정정했다. 아서는 20년 동안 변한 게 없기는커녕, 훨씬 더 알기 어려워졌다. 전혀 알 수 없는 이유로 기분이 좋아진 그는 다시 앞장서기 시작했다. 그는 지하실 방 끝에 있는 문을 열었다. "문은 전부 닫아. 하나라도 빼먹으면 안 돼." 그게 무슨 말인지, 나는 곧 알 수 있었다. 아서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가 문을 닫으며 안으로 들어가자, 아서는 또 다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내가 문을 닫고 들어가자, 아서는 또 다른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것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어디에도 써먹을 수 없는 작은 방이 연속해서 나왔다. 오라클이 놓인 방도 결코 작지 않았는데, 이렇게 낭비된 공간에 비하면 협소해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방이 몇 개인지 아서가 알고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모든 방이 똑같은 모양, 똑같은 크기였다. 그리고 어떤 물건도 없었다. "이제 다 왔어." 어느 방에 도착하자 아서가 말했다. 나는 문을 닫으며 불평을 토해냈다. "이 지긋지긋한 마트료시카도 끝인가? 제발 좀 앉아서 쉬고 싶군." "그 부탁은 못 들어주겠는데." 마지막 방은 지금까지 지나온 방들과 사뭇 달랐다. 무엇이 달랐냐면, 벽면에 작은 찬장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전부였다. 그 외에는 다른 방과 똑같았다. 좁고 협소한 방. 그리고 눈앞에는 또 다른 문. *마지막* 방은 아닌 게 분명했다. 아서는 찬장에서 위스키 두 병을 꺼냈다. "마셔." "이런 저택에 비치될 만한 물건으론 안 보이는데." 라벨을 확인한 나는 미간을 좁혔다. 실제로 그것은 공장 노동자들이 마시는 싸구려 위스키로, 오로지 취하기 위한 그런 술이었다. "나는 먹을 것에는 까다로워." "숙취가 쎌수록 좋거든. 여러 종류 마셔봤지만, 이게 제일 독해. 아침이 되면 머리가 깨지지." 그게 뭐가 좋다는 건지 몰랐다. 그는 위스키병을 열면서 찬장에서 또 다른 물건을 꺼냈다. 나는 기겁하며 물었다. "그건 담배인가?" 아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성냥을 꺼내 찬장에서 꺼낸 궐련에 불을 붙였다. 방 안에 단 냄새가 가득 찼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냄새의 정체를 아주 잘 알았다. 런던의 빈민가, 화이트채플 어디서나 맡을 수 있는 냄새였으니까 말이다. "아서 프랑크!" 일찍이 나는 아서를 동경했다. 그는 언제나 특별한 존재였다. 아서와 어울리는 것은 언제나 특별한 경험을 선사했다. 그가 가진 부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없는 카리스마와 상상력이 있었다. "한다는 게 기껏 이거였나?" 그 장면은 청년 시절부터 이어졌던 그 은밀한 동경을 단숨에 무너트릴 만큼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그에게서 느껴졌던 신비함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영국 최고의 명사들을 위한 아편굴?!" 엄선된 명사들, 사라진 사용인들, 거대한 비밀 지하실, 무수히 많은 방과 문.... 모든 수수께끼가 최악의 형태로 설명되었다. 나는 실망을 넘어 분노했다. "오해야." "이걸 보고 뭐가 오해란 말인가!" "많은 사람이 아편을 종착지로 여기지. 그래서 오해하는 거야. 하지만 이건 과정이야. 찬물에 들어가기 전에 발을 담그는 그런 준비 과정이라고." 아서는 익숙한 동작으로 궐련을 피웠다. "들어본 것 중에 최악의 변명이군. 난 돌아간다." "믿건 말건, 여기까지 데려온 건 네가 처음이야." 나는 발을 멈췄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좀 특이한 모양이더라고. 도통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할지 모르겠어." "확실히 그런 모양이군. 내가 이토록 실망할 줄도 몰랐던 모양이니!" 그러자 아서는 내 말의 어디가 그리 웃긴지 폭소했다. "정말로 자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군그래. 너는 아주 특별해. 어쩌면 나만큼 말이지." 나는 뭔가 말하려 했으나, 아서는 기회를 주지 않았다. "너는 동상이 뭔지 알고 있었어. 이름뿐만 아니라, 그것이 정확히 뭔지도 말이야. 아니야?" 나는 입을 닫았다. "그렇다면 내 행동이 목적성을 띌 수 있다는 것도 알겠지. 저 문 너머에 어떤 존재가 있느냐에 따라서 말이야." 아서의 말은... 사실이었다. 나는 아서가 마약 중독자라는 사실에 실망하는 한편, 어떤 가능성에 대해서 눈치채고 있었다. 그저 내 현실적인 사고가 애써 그걸 부정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크툴루 신화는 인간에게 친절하지 않다. 맨 정신으로 목도하는 것만으로 인간을 완전히 미치게 만드는 신화적 존재들이 즐비한 세계관이었다. 그에 대해 인간이 대비할 방법은 아주 적었다. 술과 마약으로 뇌를 마비시키는 것은, 사실 그 방법으로 나쁘지 않게 여겨졌다. 그리고 아서의 말은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그는 간접적으로, 그런 것들이 실존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는 동상의 정체따위를 묻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이상으로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틀림없이 공포가 원인이었다. 공포 외에는 없었다. "그리고 넌 도망치지 않아." "그건 무슨 근거로 하는 말이지?" "근거는 없어. 내 추측이야. 나는 다른 사람 생각을 모른다고 했잖아." 아서는 혀가 풀린 발음으로 말했다. 아편 때문에 밝게 빛나던 눈은 노랗게 충혈되어 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알지. 너는 위험한 걸 피하지 않아. 아니, 그 수준이 아니지. 너는 위험을 즐겨." "내 신조는 안정적인 인생이지만?" 아서는 고개를 저었다. "넌 미친놈이야."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날 두고 가지도 않겠지." "그건 추측보다는 희망사항 아닌가?" "그런 편이지." "하지만 아편은 안 해." "아, 강직하시군." 아서와 나는 잠깐 서로 마주 보고 웃었다. 나는 위스키를 들이켰다. 입부터 위까지 뜨겁지 않은 곳이 없어, 심지어 그 형태를 느낄 수도 있었다.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고양감에 사로잡혔다. 아서 탓이었다. 그가 있으니 청년 시절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래, 한 번 보지. 그 난리를 치면서 보여주려 한 게 뭔지 말이야." 아서는 고개를 힐끔 돌렸다. "문이 닫힌 건 확인했지?" "그래, 그런데 이 문이 다 뭐길래 난리인가?" 아서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 보면 알거야. 미리 경고하는데, 뾰족한 거 갖고 있으면 전부 버려." 문이 열렸다. 코가 썩어버릴 것 같은 악취가 쏟아져 나왔다. 나는 문 너머, 어둠을 엿봤다. 거기 존재한것은괴물이었다. 그것은살아있는 동시에썩어있었고재생하며동시에부패했다. 거미의형태를한것은때로는 여덟개때로는열두개의 다리를가져그수를짐작하기어려웠다. 안면에는인간을닮은이목구비가존재했으나일정한형태를갖추지못했다. 매순간안면은융해와 응고를반복했기에 그것이 웃는지우는지알기어려웠다. 품에는사람 크기의 흰고치가안겨있었는데그것을사랑스럽다는듯이 껴안고있었다. 나는본능적으로두존재가피식과포식이상의감정적 교류를하고있다는걸깨달았다. 역겨운사랑이다! 그것은거미줄위에누워있었는데나는그거미줄이실로짜여진것이아님을알았다. 문이다! 문을열어서는안됐다! 저것은모든문을순식간에통과해나에게도착한다! 문이더필요해! 나는이순간무엇보다산탄총을원했다! 저것을쏘고내머리를쏴야했다! 저것이나를봤다! 나는허리띠를풀어내목에걸었다! 아서가내어깨를잡아당겼다! 나는 속절없이 뒤로 넘어졌다. "아악! 아아아아악!" 고통은 비명의 신호탄이 되었다. 나는 목이 쉴 정도로 비명을 질렀다. 아서는 내 턱을 잡고 그 위에 위스키 한 병을 더 부었다. 나는 바닥에 토했다. "케엑! 켁! 켁! 아아아아! 이게 다 무슨 속셈인가!" 나는 절규했다. "무려 20년이나 연락 한 번 없더니, 갑자기 추리 소설에나 나올 법한 저택에 들이질 않나, 존재할 리 없는 미래 기술을 선보이고, 불가사의한 가정사를 말하고, 이제는 저런 괴물을! 괴물을!" 아서는 쓴웃음 지었다. "필로, 나는 잡종이야. 저 괴물은 나의 친모지." 나는 멍하니 그 말을 이해하려 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극히 최근이야. 선친께서는 그가 가진 저주받을 성욕으로 저 괴물과 교접했지. 그 대가는 참혹했어. 자손인 우리 쌍둥이에게는 더더욱 말이야. 나와 형은 한 인간이 가져야 할 것을 나눠 가졌지. 내 경우엔 늙음이었고, 형은 젊음을 빼앗겼지." 내 머릿속에 한 노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안면이 녹아내린 것처럼 보일 정도로 노후한 집사였다. "그래, 맞아. 네가 본 집사는 내 형이야. 40년간 어떤 교육도 받지 못하고 학대당하며 산 사람에게 상식을 가르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넌 상상도 못할 거야. 덕분에 저택의 모든 사용인이 일을 그만뒀지." 나는 집사의 어색한 동작을 떠올렸다. 노크를 막 배운 듯한 공손한 동작? 아니었다. 그는 말 그대로 노크를 막 배운 것이었다! "그러던 도중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군. 우리 형제가 인간을 반씩만 나눠 가졌다면, 나머지 반은 뭐로 채운 걸까? 나는 대체 뭘까, 필로? 필로?" ...그 뒤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주변인들의 말에 따르면, 나는 허리띠가 풀려 바지가 벗겨진 채로 미친 듯이 쩔뚝이며 내가 사는 아파트까지 뛰어왔다고 한다. 프랑크 저택으로부터 시간으로만 7시간 이상 달린 셈이었다. 의족은 발을 완전히 파고들어, 피투성이로 쓰러진 것을 마리가 발견하고 나를 병원까지 호송했다. 다리의 상태는 악화되어 의사로부터 한 달 동안 절대 안정 처방을 받았다. 나는 한 달을 침대에서 보내게 되었다. 이 모든 사건이 내가 과음한 탓이라고 믿는 마리는 금주령을 내렸다. 나는 해고를 핑계로 협상하려 했으나, 마리는 기어코 내가 숨겨놓은 모든 와인을 찾아 숨겼다. 나는 몇 안 되는 즐거움 중 하나인 식후 와인 한 잔을 빼앗긴 탓에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 날 이후, 나는 누군가 문을 여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현관과 내 방문이 동시에 열리는 것만큼은 어떤 경우에도 허락하지 않는다고 엄포를 놓은 탓에 마리는 더욱이 나를 치매 환자 취급하기에 이르렀다. 아서 프랑크는 연락하지 않았다. 나는 그에 대해 생각하는 것만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아서 애써 그 사실을 외면했다. 아, 그래, 아마 궁금할지 모른다. 그 뒤로 그는 어떻게 됐을까. 그가 나를 선택한 이유는 뭔가. 프랑크 학술회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리고 나는 어째서 뇌내 독자들에게 말을 걸고 있는가. 아직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프랑크 저택을 방문한 날로부터 정확히 2달 뒤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호외요, 호외! 런던에서 운석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녹색으로 빛나는 운석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호외요, 호외!" 원하건 원하지 않건 지구의 음지는 게걸스럽게 런던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06. 1895년 5월 17일, 세 명의 손님 프랑크 저택에서의 소동 이후로 2달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요양 중에 있었다. 어느덧 완연한 봄이 된 런던 거리에서는 겨울 동안 잊고 있었던 매캐한 기름 냄새가 풍겼고, 나는 창문을 여는 일이 줄어들었다. 그 정도가 내게 일어난 모든 변화였다. "나가서 조금 걷는 게 어때요?" 마리는 점심을 가져다주며 말했다. 아, 청어 튀김이라. 끔찍하군. "왕진 오신 의사 선생님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이제 조금씩 걸으면서 근육을 회복해야 한다고." "날이 풀리면 좀 걷지." 나는 늘 하던 변명을 입에 담았다. 평소라면 이 정도로도 넘어갔을 마리였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는지 그녀는 커튼을 밀어내고 창문을 열었다. "이봐." "이대로 여름까지 누워 계실 게 아니면, 말씀하신 날은 진작에 풀렸답니다. 벌써 60도라고요." "정확히 말하면 59도겠지." "그거나 그거나죠!" "아니, 전혀 다르지. 앞자리가 다르지 않나." 나는 머리맡에 놓인 화씨온도계를 살피며 말했다. 지난 40년간 익숙해진 단위였지만 여전히 섭씨로 환산하지 않고는 직관적으로 와 닿지 않았다. 섭씨로는 얼추 15도에서 16도. 벌써 그렇게 되었나? 매일 신문을 통해 날짜가 지나는 것을 보고 있었지만, 그날의 사건 이후 벌써 두 달이나 지났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내가 두 달 동안 한 것이라고는 온종일 아편에 취한 사람처럼 멍하니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저택에서 있었던 사건 이후로, 더럽혀진 내 영혼은 여전히 그 미로 같은 저택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시간도 공간도 모든 것이 모호한 그곳에서 무수한 문을 여닫으며 떠돌고 있는 것이다. "주인님, 주인님!" 나는 눈을 깜빡였다. "선생님을 불러올까요?" "아니, 괜찮아. 약이 독해서 말이지."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는 마리를 향해, 나는 매번 하는 변명을 입에 담았다. "주인님은 약도 안 드시잖아요." 마리는 약통을 쳐다보며 말했다. 2주 전에 왕진 의사로부터 처방받은 그 약은 여전히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약통과 마리를 번갈아 쳐다보며 무슨 시답잖은 변명으로 상황을 타개할지 궁리했다. 그 순간이었다. ───찌르르. 현관 쪽에서 들린 초인종 소리에 나와 마리의 고개가 꺾였다. "손님이 오기로 했나?" "아니요. 나가볼게요." "아." "문 말이죠. 닫아놓을게요." 마리는 내 말을 끊고 문을 닫고 나갔다. 어중간하게 말이 끊긴 나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물을 홀짝였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웅성거리며 들려왔다. 잠시 후, ───덜컥. "이런, 식사 중이었나?" "아니요, 딱 좋습니다. 입맛이 없었는데 좋은 핑계거리가 생겼군요." 나는 한 입도 먹지 않은 청어 튀김이 담긴 접시를 밀어내며 말했다. "하하, 나도 자네 같았으면 좋겠군. 그러면 뱃살도 쉽게 빠질 텐데." 문을 열고 나타난 남자는 능청스럽게 웃으며 자신의 배를 두드렸다. 귀족이라면 하지 않을 언동이었다. 실제로 그는 귀족이 아니었지만, 그 사실로 그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런던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얼굴에 기름이 흐르는 초로의 남성이었다. 날씨를 생각하면 조금 버거울 정도로 요란한 양복과, 손가락에 끼워진 보석 반지 3개, 앞니가 있을 자리에 채워진 금니 등, 어딜 봐도 부티가 흐르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의 과장스러울 정도로 부유한 모습이 겉치레가 아님을 알았다. 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부자였으니까 말이다. 물론 첫 번째는 아서였지만 말이다. 휘트니 리치먼드, 리치먼드 사의 창업자이자 런던 굴지의 사업가가 바로 그였다. "그나저나 평소엔 달관한 서생처럼 굴더니만, 자네도 아직 젊더군그래. 아편이라도 했나?" "무슨 말씀입니까?" 리치먼드가 실실 웃으며 말하자, 나는 깜짝 놀라며 반문했다. 아편이라는 단어를 듣자, 저택의 사건이 직전에 있었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거 말이네, 그거. 바지를 벗고 온 동네를 뛰어다녔다지 그래?" 리치먼드는 파안대소하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주제였기에 나는 급하게 손사래 쳤다. "오해가 조금 있습니다." "겸양 떨지 않아도 좋아. 나는 오히려 더 마음에 들었으니까." "정말로 큰 오해가 있습니다." 아무리 더 이야기해봤자 오해가 풀릴 것 같진 않았기에, 나는 급하게 주제를 돌렸다. "약속도 없이 갑자기 찾아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좋은 일 아닌가. 진짜 돈 되는 일이란 이렇게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라네. 그때마다 형식이나 규제에 발목 잡히는 멍청이는 한 푼도 챙기지 못하겠지만." 미국인(Yankee), 그는 그런 별명으로 불렸다. 이 성공한 중년 기업인은 화려한 성공 경력만큼 짙고 어두운 그림자를 발치에 끌고 다녔다. 런던 내 누구보다 시기와 질투를 받는 인물이기 때문일까, 그에 대한 악평은 허황되게 느껴질 정도로 과장되고 있었다. 소문 속 리치먼드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런던 시장과 청탁 관계로 잡혀가지 않는, 그야말로 그린 듯한 악덕 기업인의 표본이었다. 그 모든 소문을 믿건 믿지 않건, 그가 공공연히 몇 가지 소소한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번에 찾아온 건 다름이 아니라 한 가지 부탁이 있어서 그러네. 운석 채굴권으로 시비가 붙었어. 그 건에 자네의 도움이 좀 필요할 것 같아서 말이지." "운석 채굴권이란 게 뭡니까?"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희한한 표현이었다. "그래, 아무리 틀어박혀 사는 자네라도 런던에 운석이 떨어진 건 알고 있겠지?" "네, 들었습니다. 제이콥 섬이었다죠." 제이콥 섬. 런던의 동부, 템스 강 하류에 위치한 이 작은 섬과 인근은 산업화의 역풍을 가장 강하게 맞은 동네였다. 공장과 가정에서 쏟아져 나온 오물은 강물을 타고 와, 이 작은 섬 전역을 뒤덮었고 땅과 건물은 썩고 버려졌다. 섬에는 온갖 해충이 들끓었고, 사시사철 어디서나 시체 썩은 냄새가 풍겼다. 런던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만이 이 기피 지역에 살았다. 창부, 노숙자, 범죄자... 도시에서 소외된 이들은 떠밀려 온 기름투성이 생선을 먹으며 살았고, 런던 시는 이 지역의 관리를 포기했다. 대신 경찰을 보내 이들이 런던으로 다시 기어나오지 못하게 통제했다. 그런 런던 최악의 동네, 제이콥 섬의 한가운데에 운석이 떨어진 것은 이틀 전 새벽, 폭풍우가 치던 날이었다. "그리고 이건 비밀이지만, 제이콥 섬 전역의 개발권은 공식적으로 우리 리치먼드 사에 있다네." 나는 공식과 비밀이라는 표현을 함께 쓸 수 있는 리치먼드의 언어 구사에 감탄했다. "그랬습니까?"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거든." 들은 적 없는 사실에 되묻자, 그는 태연히 대답했다. "그러니까 거기 떨어진 운석도 공식적으론 우리 회사 소유지." "음... 계속하시죠." 논리의 비약이었다. 나는 판단을 보류하며 추임새를 넣어 이야기를 재촉했다. "그런데 거기서 그 자식이 소송을 제기한 거야." "그 자식이 누구죠?" "누구겠나, 에식스의 이빨 빠진 늑대 새끼지!" 잠깐 생각하던 나는 그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은랑백(Silver Wolf) 말이군요." "그 늙은이가 말하길, 운석이 날아오기 시작한 것이 일주일도 더 됐을 테고, 일주일 전에는 섬이 자기네 소유 였으니 운석은 자신의 것이라더군. 그 노인, 치매라도 걸린 것 아닌가?" 리치먼드는 아직도 분이 식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며 말했다. "법률문제라면 회사에 자문이 여럿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저보다 나을 텐데요." "아, 그래, 그 식충이 놈들도 문제야. 판례가 없다면서 하나같이 사리지 뭔가? 그따위니까 놈들이 그것밖에 못 하는 거야. 내가 사업을 위해 모레턴 전체를 사들였을 때, 전례가 있었나? 아니, 나는 언제나 처음이었고, 선두였어! 영국인이란 자고로 미지를 개척해야지!" 사실 이토록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는 리치먼드는 영국 기준 굉장히 특이한 사람이었다. 나는 문득 그가 그런 면에서는 아서와 닮았다고 느꼈다. 어쩌면 감정에 솔직한 것이 재산을 불리는 데 무슨 영향을 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자네는 그런 풋내기들과 아예 다르지. 이런 돌발 상황에는 프로가 아닌가?" "남들보다 삶의 굴곡이 조금 많긴 했죠. 하지만 프로라 불릴 정도는 아닙니다." 나는 난색을 표하며 부정했다. 노력해서 나름 평범히 살았다고 자부하건만, 돌발 상황의 프로라니 터무니없었다. 리치먼드는 전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내 조건은 하나뿐일세. 재판 일 전까지 뭐가 됐건, 나한테 유리한 증거를 가져다주게. 이번 일만 잘 처리되면 우리 회사에 적당한 자리를 하나 마련해 보겠네. 자네도 고정 수입이 필요한 나이가 아닌가." 여느 때와 같았다면 나는 그 제안을 거부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시기가 안 좋았다. 프랑크 저택에서 *그것*을 보고, 두 달도 되지 않아 빛나는 운석이라는 불길하기 짝에 없는 것이 내 인생에 나타난 것은 우연의 일치치고는 너무 절묘했다. 그럼에도 그 제안은 구미가 당겼다. 사실 나는 금전적인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다. 군인 연금은 런던 생활비로는 충분하지 않았고, 2달간 은둔 생활을 하는 탓에 그것을 메꿔주던 강연비나 소소하게 투고해온 칼럼 원고료도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모아둔 저금은 제법 있었지만, 인생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는 한 저금에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잠깐 고민한 끝에 긍정이나 부정 대신 소극적인 대답을 돌려줬다. "뭔가 찾아내면 연락드리겠습니다. 큰 기대는 하지 말아주시죠." "완벽하군." 리치먼드는 자랑스럽게 금니를 내비치며 웃었다. ...잠시 후, 리치먼드가 떠난 실내는 거짓말처럼 조용했다. 런던 거리의 소음이 멀게 느껴질 무렵, 나는 옆에 치워뒀던 청어 튀김을 돌아봤다. 딱딱하게 굳은 튀김의 표면엔 기름이 굳어 있어 아까 전보다도 훨씬 식욕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대체 왜 영국 요리사는 튀기는 것 말고 생각을 못하는 거지? 나는 무식할 정도로 일관적인 영국의 조리법에 불평하며 접시를 다시 허벅지 위로 올려놨다. 리치먼드와 대화 도중 정신 차린 나는 지난 사흘 동안 아무것도 먹을 게 없다는 걸 떠올렸다. 이래서야 마리가 걱정할만도 했다.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잡았다. 그 순간, ───찌르르. 초인종 소리에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다시 접시를 옆쪽으로 치워놨다. 리치먼드씨가 뭘 두고 갔나? 나는 침대에 앉은 채로 바닥과 옷걸이 쪽을 살폈지만, 그런 고급스러운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덜컥. "주인님, 손님이 오셨는데요?" "누구지? 일단 들여보네." 현관문이 열리고, 마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후, 나는 방문객의 정체를 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시간을 잘못 잡았나?" "...아니요, 딱 좋습니다. 입맛이 없었는데 좋은 핑계거리가 생겼군요." 살갗이 베인다는 착각을 일으킬 만큼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노인이었다. 절도 있게 뻗은 하얀 콧수염은 그야말로 영국 신사의 표본이었고, 일흔이라는 나이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깨는 각지고 허리고 꼿꼿했다. "그런가." 나는 그 담백한 한 마디에 어깨를 움츠렸다. 누구라도 저 눈앞에서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은랑백. 왕가를 맴도는 흰 늑대. 필 에식스 백작은 차가운 눈으로 내 방을 살짝 훑었다. 나는 숙제를 검사받는 학생이 된 듯한 착각에 빠졌다. "남작 부인께서는 무고하신가?" 잠시 후, 에식스 백작은 적막을 깨고 상투적인 인사치레를 말했다. 물론, 나는 결혼하긴커녕, 평생 연애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여기서 남작 부인이 내 아내를 뜻하는 게 아니란 건 나도 그도 알았다. "어머니께서는 별 탈 없이 지내고 계십니다." "기쁜 소식이군." 나는 그것이 완전히 의미 없는 인사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에식스 백작은 지금은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의 오랜 지인이었다. 덕분에 나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의 소개를 통해 에식스 백작과 몇 번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정말 특별한 경험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귀족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던 나는, 아버지가 에식스 백작과 아는 사이라는 것만으로 그가 귀족이란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소박하면서 기품을 잃지 않은 옷차림이나, 단정한 외모와 절도 있는 동작, 자신감 넘치는 태도, 그야말로 모든 것이 귀족적이었다. 더 이상 만날 이유가 없는 아버지와 마지막까지 교류한 귀족이니, 그의 인사를 그저 그런 예의상 한 마디로 치부하는 건 지나치게 무례한 생각일 터였다.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아버지의 장례식이었으니,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었다. 그때까진 아슬아슬하게 중년이라 부를 수 있었지만, 지금 모습은 영락없는 노인이었다. 키는 더 작아졌고, 머리 색은 하얗고 숱도 적었다. 하지만 그 눈매만은 내 기억 속보다도 날카롭게 예기를 띄고 있었다. "허버트 남작께서는 재산은 잃었지만 존엄을 잃는 일은 없었다." 에식스 백작은 영문 모를 화제를 꺼냈다. 그는 차가운 눈초리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반면 자네는 돈도 명성도 부족하지 않으면서도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더군. 어느 경망스러운 귀족 자제가 추태를 보였나 했더니, 신문에 자네 이름이 적혀 있는 걸 보고 내 눈을 의심할 지경이었지." 나는 그제야 에식스 백작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깨달았다. 그저 작은 해프닝이라고 생각했는데, 고작 나 정도의 인물이 바지를 벗고 런던을 달린 이야기가 런던 최고의 사업가와 명망 높은 백작의 귀까지 들어갈 줄은 몰랐다. "선친의 이름에 맹세코 추문이 퍼지지 않도록 주의하도록." 에식스 백작의 차가운 눈초리에 내 허리가 살아 있는 생물처럼 절로 펴졌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선친의 친우로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네." 감정이 절제된 영국 귀족의 전형인 에식스 백작이 설마 나를 걱정하는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그를 쳐다봤다. 표정은 여전히 냉담하기 짝에 없어서, 나는 무심코 내가 환청을 들은 것이 아닌가 의심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대등한 사업 얘기니 정으로 말하진 않겠네." 어떤 차이가 있는지 와 닿진 않았지만, 그 나름대로 선을 긋는 듯했다. 나 역시 굳이 사양하지 않고, 내가 가진 패를 미련없이 꺼내놓았다. "운석 건이군요." 에식스 백작은 의외라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알고 있다면 부연 설명은 삼가지. 나는 현재 복잡한 소송 상황에 놓여 있네. 상대는 돈밖에 모르는 양키놈이지." "자세히 말씀해 주시죠." 에식스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운석이 떨어진 장소는 알고 있는가?" "제이콥 섬이죠." "그래, 그리고 그 섬을 우리 가문이 지난 200년간 다스려온 사실도 알고 있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문의 선조, 모리스 에식스 백작께서 당대 국왕이셨던 찰스 2세 폐하께 제이콥 섬을 수여받은 이래 우리는 그 땅을 질서로 다스렸네." 책 속에서만 들어본 과거의 인물이라 생각했던 전 국왕의 이름이 나오자, 과연 귀족의 일이라는 체감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이야기에는 이상한 점이 있었다. 런던 최악의 빈민가가 질서로 다스려졌다라.... "그런데 어제 그자가 나타났네. 리치먼드의 장사꾼 놈 말이네. 쓰레기에 벌레가 꼬이듯, 그자는 운석이 떨어진 장소에 쥐새끼처럼 솟아났지. 그리고 누구 하나 속이지 못할 법한 조잡한 위조문서로 운석의 소유권을 주장하더군. 가장 놀라운 점은 런던 법원이 그 주장을 받아들였다는 거지." 에식스 백작은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와중에도 드문드문 그답지 않은 분노를 표현했다. 그가 이번 도전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쉬이 짐작 가는 대목이었다. "이런 종류의 법적 분쟁에 자네의 입김이 제법 강하다고 들었네." "금시초문이군요." 오늘 그런 소리만 벌써 두 번째였다. 평생을 성실히 살았다고 믿었는데, 이런 괴팍한 사건에 연이어 찾아오는 손님에 나는 내 일생을 의심하는 지경이 이르렀다. "뭐가 됐건, 재판에서 그 사기꾼의 낯짝을 까발릴 증거를 부탁하네. 듣자하니, 외부 강사 일을 하고 있다던데, 이번 일만 잘 끝나면 자네를 정교수로 추천하는 추천장을 써주겠네." 그건 정말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에식스 가문의 은랑백 정도 되는 사람의 추천장이라면 어느 대학에서도 가볍게 여기지 않을 터였다. 나는 문득 물었다. "운석이 그렇게 중요합니까?" "설령 하늘에서 순금이 떨어졌다고 해도, 그건 결코 중요하지 않지." 에식스 백작은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는 듯이 천천히 말했다. "중요한 건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었다는 사실 하나뿐이네." 그는 짧으면서도 격식 있는 인사를 마치고 방을 떠났다. ...리치먼드에 은랑백, 10년에 한 번씩 맞기도 힘든 손님을 연이어 맞이한 탓인지, 나는 묘한 탈력감에 침대에 쓰러지듯 기댔다. 내 고개 옆으로는 차갑게 식고 퍼석퍼석하게 굳은 청어 튀김이 놓여있었다. 마리를 불러서 다시 데워달라고 할까 고민하다가, 모든 것이 귀찮아져 그냥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그 순간이었다. ───찌르르. "젠장!" 나는 무심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나는 접시를 다시 옆으로 치웠다.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지난 2개월 동안 병문안으로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는데, 그깟 운석 한 번 떨어졌다고 이렇게 손님이 들이닥칠 수가 있다니. ───덜컥. "주인님." "누구든 좋으니 들어오라고 해! 이것 좀 가져가서 데워오고!" 나는 무고한 마리에게 화풀이를 하며, 청어 튀김을 내밀었다. 그리고 이번엔 얼마나 대단한 손님이 방문했는지 보자는 심정에 문쪽을 노려봤다. 잠시 후, 방문이 다시 열리고, 대망의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혹시 제가 방해했나요? 저를 기억하고 계신가요?"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불만 한 마디 나오지 않았다. 런던에서 내로라하는 부르주아, 저명한 백작 나리와 비교하면 세 번째 방문객은 초라하기 짝에 없었다. 하지만 진정 역사에 남을 이는 누구도 아닌 눈앞의 여인이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퀴리 부인, 오늘은 어떤 일로?" "혹시 런던에 떨어진 운석에 대해 들으셨나요?" 나는 오늘의 세 번째 질문에 처음 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07. 신비하게 빛나는 녹색 운석 같은 날 오후, 우리는 템스 강 유역을 걷고 있었다. 우리라는 표현에서 알았겠지만, 나 혼자가 아니었다. 퀴리 부인은 긴장한 표정으로 내 바로 옆에 붙어서 따르고 있었다. 사실 저번에도 그런 면모가 얼핏 보였지만, 그녀의 이런 소극적인 면모는 나로선 의외였다. 전생의 역사서나 위인전에서 본 기록을 통해, 자연스럽게 더 당당하고 여장부다운 스타일을 상상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녀의 그런 강직한 면모들이 형성된 것은 당대의 차별과 불운한 상황들이 만들어낸 후천적인 것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그녀에게도 풋풋했던 사회 초년생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완성된 위인은 없구나. 나는 역사의 숨겨진 이면을 엿본 기분으로 홀로 감탄했다. 그런 퀴리 부인이 지금 뭘 하고 있느냐면, "우웁...." 내 옆에서 헛구역질을 반복하고 있었다. "괜찮나?" "네, 네에... 견딜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벌써 방사능 부작용이 나타난 것인가 놀랐지만, 진짜 이유에 대해서는 곧 알 수 있었다. 이유는 런던 템스 강 자체에 있었다. 이 이야기 속에서도 몇 번이나 강조한 바이지만, 런던은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도시다. 런던을 가로지르는 템스 강은 그 오염의 정수로, 템스 강 주변에 지어진 건물은 그 악취로 창문조차 열지 못했다. 「프린세스 앨리스호 침몰 사건」 당시 구조된 승객 130명이 강물을 마셔 사망한 충격적인 사건이 17년 전에 불과했다. 당연히 외국인인 퀴리에게 너무 생소한 환경인 것이었다. 아니, 생소하다기보다는 역겹다고 할까. 런던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다른 도시는 이렇지 않나 보군?" 그렇지만 이 정도로 호들갑 떨 정도인가. 약간 서운해진 나는 슬쩍 떠보듯이 물었다. "파리는 조금... 그렇지만 제 고국에는 이런 게 없어서요...." 퀴리는 변명하듯 말했다. 그 대답에 나는 슬며시 미소 지었다. 과연, 파리는 조금인가. 그래, 피차 산업 국가의 수도인데, 프랑스도 크게 다를 리 없지. 애초에 퀴리 부인이 비참한 말년을 보내는 이유는 프랑스의 편협함 때문이었다. 영국이었다면 그보다는 나았을 것이다. "고국이라면 바르샤바, 폴란드인가. 아름다운 도시라 들었지." 사실 이 시대에 폴란드라는 나라는 없었다. 유럽의 3대 열강인 프로이센 왕국, 러시아 제국, 합스부르크 제국이 이 가련한 나라를 셋으로 쪼개 분할 통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도 폴란드의 국민 정체성은 희석되지 않았고,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마리 퀴리 같은 애국자를 배출하고 있었다. 그녀의 유별난 애국심은 그녀가 처음 발견한 원소에 지은 이름이 폴로늄이란 것만으로도 엿볼 수 있었다. 아니나다를까, 내 대답에 퀴리는 창백한 안색 그대로 반색하며 답했다. "맞아요, 400년 역사의 자랑스러운 도시죠." 두 애국자는 서로 프랑스와 러시아 제국을 욕보인 것만으로 즐거워 마주 보며 웃었다. 어느 샌가 역사 속 위인을 상대하고 있다는 감정은 희석되고, 딱 그 나이에 맞는 장래 유망한 연구자와 함께하는 기분이었다. "다시 한 번 시간 내주셔서 감사해요. 런던에서 저 같은 외국인은 환영받지 않아서요." "열정적인 학자를 돕는 건 언제나 큰 기쁨이지. 그렇잖아도 제이콥 섬에는 볼일이 있었으니 말이야." "아까 말씀하셨던 조사 건이네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행하게 된 퀴리에게는 미리 내 조사에 대해 상세히 전했다. "아까는 미처 묻지 못했지만, 자네야말로 날 선택한 이유가 뭔가?" "학자로서 존경하기 때문이라고 하면 부족할까요?" "영광이네만, 설명으로는 부족한 편이지." 사실 퀴리가 내게 의탁한 것은 꽤 의아한 일이었다. 그녀와 내가 만난 것은 2달 전 프랑크 저택 지하에서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고, 그조차도 좋은 인상을 준 적은 없었다. 반면 그녀는 학술회의 정회원으로, 아서가 주장하는 한 최고의 지성인들만 모였다는 학술회에 그녀의 연구를 도울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생각할 순 없었다. 적어도 아서 본인이라도 가능한 것이 아닌가. 그가 이렇게 흥미로운 이야기에서 발을 뺄 리가 없는데. "사실, 회장님과 박사님의 관계를 모르는 만큼, 가급적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진 않았는데...." "부담 없이 말하게." 사실 아서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머리가 따끔거렸다. 기억해서는 안 되는 존재가 함께 상기된 탓이었다. 그런 한편, 그의 근황에는 적잖은 흥미가 있었다. 그런 모순된 감정이 내 안에 혼재했다. "프랑크 학술회는 마비됐습니다." "뭐?" "그날 이후, 회장님은 하루종일 기분이 나빠 보이셨어요. 누구하고도 대화하지 않고, 방에서 나오는 일도 줄어드셨죠. 그러다 한 달 전쯤에 아무 통보도 없이 저택을 폐쇄하셨어요." 퀴리의 담담한 고백에 나는 충격받았다. 아서 같은 독불장군이 내 일탈에 그토록 격하게 반응했다는 것도 그렇고, 그의 무책임한 태도 그 자체에도 크게 놀랐다. "다른 회원들도 있지 않나?" "아... 그게 말이죠." 내 질문에 퀴리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프랑크 학술회는 어디까지나 회장님의 개인 학술회예요. 회원 선정도 그분 마음대로 하시죠. 그런 만큼... 어...." "괴짜들만 있겠군." "...그런 편이죠. 다들 학술회로만 연결된 사이다 보니, 저택이 폐쇄되니 연락할 수단이 없더라고요. 다들 런던 어딘가에서 각자의 연구를 하며 저택 문이 다시 열리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겠죠. 회장님에게 받은 생활비가 남은 만큼 저도 그럴 생각이었고요." 퀴리는 고개를 휙 들었다. "하지만 이번 운석에 대해 들었을 때만큼은 참을 수 없었어요. 동상 기억하시나요?" "그 두족류 머리를 가진 동상 말이군." 나는 크툴루의 형상을 떠올리며 말했다. 당시에는 별 감흥이 없었지만, *그것*을 본 이후론 크툴루 동상 역시 끔찍하게 부정하게 여겨져 기억하기조차 꺼렸다.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야기를 듣자마자 떠오른 게 있었죠. 아니, 사실 처음부터 그 가능성밖에 생각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아는 한, 이런 야광 속성을 가진 원소는 많지 않죠." "우라늄 말이군." "맞아요. 하지만 우라늄은 자연 상태에서는 빛나지 않죠. 하지만 그런 게 있다면요? 사실 저는 오래전부터 그런 원소의 존재에 대해 느끼고 있었어요. 남은 것은 검출법의 연구와 증명이죠." 나는 그녀가 암시하는 것의 정체를 알았다. 라듐. 그 원소의 발견은 퀴리 부인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였다. 그녀가 10톤의 우라니나이트에서 10g의 라듐을 추출해내는 것은 3년 뒤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녀는 벌써 그 존재를 눈치챈 것은 물론, 그 속성마저 이해하고 있었다. 역사의 흐름을 생각하면 너무 빠른 발견이었다. "혹시 이 모든 야광 광석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걸 아시나요?" "방사능 말이군." 내 대답에 퀴리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리학에도 소질이 있으신가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내 지식의 출처는 어디까지나 전생의 기억이다. 21세기 기준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복잡한 개념인 방사능의 원리에 대해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퀴리 부인 같은 전문가 앞에서 아는 척하는 대신 솔직히 말했다. "베크렐 교수의 연구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지." "그렇다면 베크렐선에 대해서도 알겠군요." 베크렐이 베크렐선, 그러니까 방사선의 발견을 발표하는 것은 1년 뒤의 이야기였다. 마찬가지로 너무 빨랐다. 착각이 아니었다. 내가 아는 모든 과학적 발견이 앞당겨지고 있었다. 오라클. 나는 증기를 먹는 그 강철 괴물에 대해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모든 것이 100년 일찍 나온 컴퓨터의 소행인가? 아니면 어떤 존재의 암약인가? 나는 애써 불길한 상상을 멈추고 태연한 척 대답했다. "그래." "저는 운석에서 나오는 베크렐선의 강도를 측정할 생각이에요. 이번 조사는 제 연구를 크게 앞당겨줄 거예요." 퀴리는 잠시 후, 자신 없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니면, 아예 무의미한 것으로 만들던가요." 그녀의 불안은 지당했다. 가설에 불과하지만, 만약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거대한 라듐 덩어리라면? 그녀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자, 훗날 지지기반이 되어줄 라듐의 발견이 하늘이 내린 기적으로 치부되며 그대로 사라질 상황이었다. 비록 미래를 모르는 그녀는 거기까지 생각하진 못하더라도, 연 단위 지속해온 연구가 이번 운석으로 없던 것이 될 상황이니, 남이나 다름없는 나를 수소문 해서 찾아온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반대로 생각하게. 자네는 행운아야. 만약 운석이 그토록 값진 것이라면, 세상의 그 어느 학자보다 먼저 조사해볼 기회를 받은 거니까. 자네는 젊어. 나랑은 다르게 말이야." 미래를 아는 나였기에, 나는 퀴리를 위로할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그녀 정도 천재라면 하늘에서 라듐 덩어리가 날아온 걸로 더 대단한 연구를 하게 될지. "베크렐 교수님이 방금 그 얘기를 들으셨으면 방방 뛰셨을걸요. 자긴 아직도 젊다고." "마흔이 넘으셨나?" "올해로 마흔한 살이세요." 퀴리와 나는 잠깐 웃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악취는 점점 심해졌다. 나는 악명 높은 제이콥 섬이 다가온다는 것을 실감했다. 평생을 런던에서 살았지만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장소였다. 악취는 그 이유가 아니었지만, 이유로 더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잠깐." 그늘 속에 앉아 있던 두 명의 경관이 일어나 우리 둘을 가로막았다. "그 여자는 창녀입니까?" 경찰봉을 뽑아든 경관은 엄숙한 목소리로 물었다. "뭐?" 나는 무심코 반문했다. 퀴리는 그런 저속한 영단어까지는 익히지 못했는지,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와 경관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 여자가 창녀인지 물었습니다." "세상에, 뭐가 문제인가. 자네들이 정녕 여왕 폐하에 충성하는 영국인 경찰이 맞나?" 갑작스러운 무례한 질문에 나는 노성을 간신히 억누르며 물었다. 표정이 얼굴에 쉽게 드러나는 타입이었다면, 지금쯤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을 것이다. "어딜 가는지 몰라도, 이 앞은 중년 장애인과 외국인 여자 둘이서 들어갈 만한 장소가 아닙니다." "여긴 영국이고, 나는 나의 여왕께서 허락하는 한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네." 두 경관은 서로 마주 보더니 피식 웃었다. "우리는 경고하는 겁니다. 설령 로열 패밀리라고 해도 이 뒤에서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경관은 경관 봉을 제 뒤쪽으로 흔들었다. 고작 몇 미터로 그곳은 런던과 다른 장소가 되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오물과 쥐의 주검만으로 그 장소의 악명을 체감할 수 있었다. "여긴 제이콥 섬입니다." 런던 최악의 빈민가. 템스 강의 모든 해충이 모여 사는 섬. 그럼에도 내 대답은 하나뿐이었다. "내가 내 몸 하나 간수 못 할 사람으로 보이나?" 두 경관은 내 말에 재밌다는 듯이 웃었다. "이봐요, 선생님. 귀족인지, 부자인지 얼마나 편하게 살았는지 몰라도 그런 건 안 통합니다." 나는 코트 속에 언제나 차고 다니는 빅토리아 훈장을 뜯어 앞으로 내밀었다. "다시 묻지. 내가 내 몸 하나 간수 못 할 사람으로 보이나?" 두 경관은 가늘게 뜬 눈으로 훈장을 살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자 경관모를 푹 눌러쓰며 고개를 돌렸다. 의미는 명백했다. "실례했습니다. 지나가십시오." "흥!" 나는 일부러 크게 콧방귀 뀌며 턱을 치켜세우며 그 자리를 지나갔다. "하지만 조심하십시오. 운석이 떨어진 이후로, 제이콥 섬은 정말로 이상한 곳이 되었습니다." 지나가는 순간, 경관 한 명이 내게 속삭였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물으려 했으나, 두 경관은 이미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나는 굳이 길을 되돌아가지 않았다. "그게 뭔가요? 그 런던 경찰들이 아무 말도 못하고 넘어가다니." 퀴리는 감탄하며 물었다. "군 훈장이네. 이거랑 바꿨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훈장을 다시 양복 위에 채우며, 지팡이로 의족을 툭 쳤다. "아, 죄송해요." "신경 쓰지 않아도 좋네." 21세기 감각으로 보면, 참 어리석은 일이다. 군대에 자원입대도 모자라, 거기서 다리를 날려 먹고 돌아왔으니 말이다. 나 역시 내 처지를 한탄하고 원망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 이제는 내가 이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은 생각해보면 참 이상한 일이었다. 21세기 감각으로 보나, 19세기 감각으로 보나 말이다. 어쨌거나 경관의 말은 사실이었다. 고작 몇 걸음 만에 이토록 다른 공간이 되었으니 말이다. "참을 만한가?" "네... 코가 마비된 덕분에요." 제이콥 섬. 그렇게 부르고는 있지만, 사실 시민들이 부르는 그 이름은 섬 그 자체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작은 제이콥 섬과 그 인근 오염 구역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빈민굴이었다. 평소 나는 그 구분을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는데 직접 와보니 그 구분은 명백했다. 냄새였다. 냄새가 공간을 나누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건...." 나는 인상을 팍 썼다. 연소된 건물 잿더미 위로 새까맣게 탄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하나뿐만 아니라 그 수는 수십에 달했다. 내 시선 방향으로 고개를 꺾은 퀴리는 역겨움을 참지 못하고 결국 토했다. 나 역시 군에서 익숙해지지 못했다면 토했을지 몰랐다. "분명 기사에는 작은 화재로 인한 소동이라 적혀 있었는데 말이지." 나는 이 참상을 작은 소동으로 격하시킬 수 있는 기자들에게 혐오감마저 품었다. 운석이 떨어진 날, 제이콥 섬은 불길에 뒤덮였다. 운석이 떨어진 충격에 의한 화재인지, 또 다른 요인이 있었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불길은 폐유로 뒤덮인 섬 전체를 삽시간에 집어삼켰고, 비가 온 다음 날 저녁까지 꺼지지 않았다. 좁은 공간에 수용되어 살던 부랑자들은 도망치지 못한 채, 화마에 삼켜지고 만 것이다. 이런 건물이 제이콥 섬에는 수십 채나 더 있었다. 이것이 19세기 런던의 실체였다. 나는 이 현실을 알았기에 필사적으로 살아남은 것이다. 여기 있는 소사체 중 하나가 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빈민굴 속으로 들어갈수록 상황은 심각해졌다. 가득한 것은 시체뿐으로, 살아있는 사람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지독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와 비슷한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비슷한 감각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히 이상한 일이었다. "나한테 붙게." "네?" 나는 그 기시감의 정체를 눈치채자마자 퀴리에게 붙었다. "절대 떨어지지 말고 붙어있게." 그리고 거듭 강조해 당부했다. 처음에는 시체를 잔뜩 본 탓에 떠올린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안일한 생각이 통할 상황이 아니었다. 경관의 말을 옳았다. 상황은 정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쫓기고 있네. 아마추어야. 하지만 몇 명인지 모르겠군." 나는 이 감각을 전장에서 느꼈다. 내가 다리를 잃었던 그 순간, 사방에서 살의를 띈 적군이 거리를 좁혀오던 그 순간. "아주 많아." 나는 품속의 훈장을 꾹 움켜쥐었다. 08. 퀴리 부인 처음 쫓기기 시작한 이래, 나는 이상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포위망의 존재였다. 체계적으로 다듬어진 포위망은 너무 이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서서히 좁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단언컨대 그것은 훈련받지 않은 부랑자들이 흉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10년 전, 내가 다리를 잃은 사르데냐 전투는 21세기 현대전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영국의 해상 봉쇄가 시작된 것은 좋았으나, 섬 전체에 도배된 해안 요새는 영국군 역시 섬에 진입할 수 없게 했다. 해로가 봉쇄된 와중에 낙오된 나의 사단은 부족한 전력과 적은 자원을 이유로 분대 단위의 게릴라 전투를 이어나갔다. 세계 어느 나라의 전술 교범에도 실리지 않은 전투, 역사상 유례없는 집단 게릴라전이 시작된 것이다. 고립된 우군과 적군 양군은 1년 동안 엄청난 전술적 진보를 거듭했다. 고작 런던 빈민굴에서 그때의 감각을 되새기고 있다는 건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몰고 있군." 나는 초조함을 감추고 퀴리에게 속삭였다. "몰고 있다뇨?" "미행을 눈치챈 걸 깨닫고, 우리를 어딘가로 유도하고 있네." 그들이 적의를 갖고 있다면, 우리를 해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터다. 고작 중년 절름발이와 외국인 여성 두 명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은 무슨 의도인지 교활하게 간격을 유지했다. 지금은 순순히 그 의도에 따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거리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우리는 더욱 기괴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발화지인 운석의 추락 지점과 가까워질수록, 반대로 불에 탄 건물이 줄어들고 있었다. 대신에 남아 있는 건물은 하나같이 괴상하기 짝에 없었다. 어떤 점이 그랬냐면, 건물에는 문이 없었다. 열려 있는 창문 턱에는 신발 밑창 자국이 잔뜩 찍혀 마치 그곳이 출입구처럼 여겨지는 듯했다. "지면이 침강했군요. 이것도 운석의 여파일까요?" "모르겠군."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광경을 알고 있는 어떤 과학적 원리로도 설명할 수 없었다. 충돌의 여파로 지면이 뒤틀릴 정도라면, 이토록 온전한 건물이 남아 있어서는 안 됐다. 사람은 여전히 한 명도 보이지 않았으나, 길 위에 뽀얗게 쌓인 잿더미 위로는 무수히 많은 족적이 찍혀 있었다. 나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신발인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발자국보다는 손자국이라고 하는 것이 어울렸다. "이상하군요." 퀴리 역시 거리의 기이한 면을 느꼈는지 내게 속삭였다. "그래, 건물들이 처음부터 이랬을 것 같진 않군." "그게 아니라, 혹시 바다 냄새가 나지 않나요?" 냄새? 나는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았다. 확실히 냄새가 바뀌었다. 템스 강 특유의 오물 냄새가 아닌 이것은 생선 비린내에 가까웠다. "마치 다른 세계에 온 것 같군요." 나는 그녀의 소감에 동의했다. 냄새가 공간을 구분한다면, 이곳은 엄연히 다른 공간이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완전히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군에서는 지도만 보고 위치를 파악하는 일이 잦았지만, 그런 내 경력은 여기서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도로와 건물의 구조는 이미 지도를 통해 익힌 것과 전혀 달랐다. 그나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점점 더 도로 깊숙이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 주민일까요?" "그렇겠지. 하지만 자극하지 말게." 마침내 몇몇 건물의 창문 너머나 골목 사이사이에 살아있는 주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런던 사람이라곤 생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추레한 몰골이었다. 재난이 일어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생존자들은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말랐으며 허공을 바라보며 이상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것은 어쩌면 기도문처럼 들렸는데, 나는 그런 끔찍한 존재들이 기도를 바치는 대상이 무엇일지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세상에! 몇몇은 대낮에 거리 한가운데에서 성행위 하고 있었다. 나무토막을 이워 맞추는 듯한 그것은 관능적이라기보다 역겨웠다. 보통 생명이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분명 생명의 과잉이었다! 나는 그 추악한 장면에 고개를 돌렸다. 차라리 불에 탄 시체가 아름다웠다. 우리는 더욱더 깊이 들어왔다. 이제 거리 초입에서 맡았던 기름과 오물 냄새는 거의 사라진 대신, 바닷물 특유의 짠 냄새와 지독할 정도의 생선 썩는 냄새가 다시금 코를 괴롭혔다. 원래 폭이 넓지 않은 템스 강은 바다처럼 광활하게 보였다. 추격자들이 누구건, 그들은 우리를 원하는 만큼 몰아넣은 것이 분명했다. 그들은 더 이상 모습을 숨기지도 않았다. 벽을 돌아보면 우리 뒤를 따르고 있는 이들의 그림자가 보였다. 셀 수 없는 숫자의 추격자가 우리의 걸음 속도에 맞춰 걸었다. ───뚜벅 뚜벅. ───철퍽 철퍽.... 저 소리! 그들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마다 철퍽이는 소리가 들렸다. 비 오는 밤, 바다 위에서 항해하는 철갑선 몸체를 파도가 때릴 때나 나는 그런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는 내가 뭍을 걷는지, 바다 위를 걷는지 헷갈렸다. 사람보다는 물귀신에게 쫓기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 추적의 끝을 예감했다. 우리 눈앞에 다리가 나타난 것이다. 제이콥 섬으로 들어가는 다리였다. 다리 너머로 아주 선명한 녹색 불빛이 어지러이 흐드러지고 있었다. "우리를 운석 쪽으로 이끌고 있군요." 퀴리가 말했다. "하지만 어째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어떤 일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모든 것이 모순이었다. 우리 둘은 다리 위로 올라갔다. 이제 저들은 모습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나, 둘...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이들은 이윽고 수십에 이르렀다. 나는 이 좁은 골목길을 그토록 많은 인원이 질서 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들은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한 유대감으로 연결된 듯했다. 하지만 문제는 형체였다. 그들은 사람보다도, 사람을 흉내 내어 옷을 입은 짐승처럼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안구는 선명하게 빛나 우리를 지켜봤고, 눈꺼풀이 없는지 눈을 깜빡이는 이들도 없었다. 코가 없어 숨쉬기가 어려운지 혀를 내밀며 헐떡이는 이도 있었다. "무슨 돌림병이 퍼진 걸까요?" 퀴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곧바로 합리적인 가능성을 제시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이 병 같은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와 같은 묘사를 나는 전에 '읽은 적'이 있었다. "이유는 묻지 말고, 지금부터 저들을 같은 사람으로 여기지 말게." "그들이 가난하고 병들었기 때문인가요?" 퀴리는 내 무신경한 말에 경멸을 숨기지 않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네." 다리를 건너자, 소문 무성하던 제이콥 섬의 참상이 드러났다. 한때 빼곡히 쌓여 올라져 있었던 건물과 선착장은 이제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섬은 거대한 크레이터였다. 바닥에 짙게 깔린 잿더미 사이로 이끼인지 곰팡이인지 모를 푸르스름한 것이 잔뜩 끼었고, 강물은 섬의 외각에 파도치듯 부딪쳐 크레이터 안으로 오염된 물을 흩뿌렸다. 크레이터의 중심에 위치한 것은 운석이었다. 이끼는 운석을 중심으로 원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다. 들은 바대로 과연 신비하게 빛나는 녹색 광석이었다. 그 흉흉한 불빛은 비켜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우리를 여기까지 유도한 추적자들은 운석을 향해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아아, 과연, 그렇구나. 저것은 지상에 도착한 지 이틀 만에 현지인의 숭배 대상이 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의 이단적인 신앙에 대해 충분히 이해했다. 저 불빛은 사람의 마음을 빼앗았다. 부나방이 그러하듯, 종국에는 파멸로 이끌릴 것을 알면서도 그 귀기 어린 아름다움에 매혹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운석이 아니었다. "저건 뭐죠...?" 퀴리는 알아보지 못하고 미간을 좁혔다. 그녀 같은 영민한 자조차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하지만 나만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무조건 운석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하늘에서 떨어진 것은 비행기였다. 초현실적인 비행 물체 따위의 불분명한 것이 아닌, 분명히 인간의 손에 의해 만들어진 초기형 복엽기 말이다. 라이트 형제의 기념적인 첫 비행보다 8년 이른 항공 사고였다. 나는 애써 충격을 뒤로하고, 비행기의 추락 원인을 분석했다. 원인은 날개 부분이었다. 날개의 단면은 어떤 강한 힘에 뜯겨져 나간 것처럼 깔끔했다. 이 부분만큼은 추락 후 파편도 보이지 않았고 비행 중에 파손된 것이다. 아무리 비행기가 빠르게 등장했다고 해도, 기상 악화를 견딜 만큼 견고하진 못한 초기형 모델이다. 이틀 전 새벽처럼 폭풍우가 치는 밤에 무리하게 운행한 결과,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나는 비행기 조종석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운전석에는 흥건한 핏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거기에는 시체 같은 건 없었다. 이 정도로 큰 출혈이 있는 사람이 제 발로 걸어서 나갔을 리는 없었다. "이런 건, 본 적이 없어요...." 반대로, 퀴리는 노골적인 핏자국조차 발견하지 못할 정도로 운석에 의식을 빼앗기고 있었다. 녹색 광선이 비치는 여인의 모습은 더없이 불길하게만 보였다. 나는 바닥에서 불에 그슬린 철제 태그를 발견하고 들어 올렸다. 장갑으로 표면에 묻은 검댕을 닦아보려 했으나, 완전히 달라붙었는지 열을 가해야만 떼어낼 수 있어 보였다. 이것은 아마 이 기묘한 비행 화물에 대한 단서를 줄 것이다. ───철퍽! 그때, 템스 강이 크게 첨벙였다.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는 그 오수 말이다. 나는 뭍으로 기어나오는 그 존재를 목격하고 경악했다. 그것은 이미 인간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이형의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 형상에 대해 가장 정확한 묘사를 해보자면, 그것은 이족보행 하는 어류였다. 돋아난 아가미 사이로는 템스 강에서 묻혀온 것인지, 검은 기름이 끼어서 바닥까지 늘어졌다. 퀴리는 뒤늦게 그 존재를 깨닫고 숨을 들이마셨다. 비명을 지르지 못한 건지, 않은 건지 몰라도 그를 자극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Bbugura!" 그것은 육성으로 외쳤다. 그 신경 거슬리는 목소리는 인간이 들을 수 있는 데시벨의 한계선에서 왕복하여, 심히 듣기 거북한 것이었다. 그 외침에 운석을 향해 절하고 있던 변이된 부랑자들이 몸을 일으켰다. 아마도 그는 이들을 이끄는 지도자, 아니면 제사장 같은 존재인 것 같았다. "무슨 뜻이죠?" "유감스럽지만, 영어는 아니네." "그리고 폴란드어, 러시아어, 프랑스어도 아니고요." "Bbugura! Szhu-tuthnn'uun Anghuha!" 제사장은 크고 넓적한 눈 속에서 안구만 돌려 우리를 쳐다보고는, 손가락의 잔재로 보이는 것을 치켜세워 바깥을 가리켰다. "떠나라는 뜻일까요?" 나와 퀴리는 조심스럽게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제사장은 다시 한 번 외쳤다. "Ahu-Aphu'tn! Szuhatan Fhtagn!" 그는 다시금 손가락 하나를 들고, 잠시 뜸 들인 뒤에 땅을 가리켰다. "한 명은 남으라는 뜻 같네요." 끔찍한 이야기였지만,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없었다. 나가서 군인을 불러오지 못하게 인질을 잡겠다는 건가? 아니면 다른 종교적인 의미가 있나? 뭐가 됐건 희생을 강요하는 사악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뜻에 순순히 넘어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 혼자라면 몰라도, 여기에 퀴리를 남길 수는 없었다. 그녀의 두뇌는 인류의 재산이다. 만약에 누군가 남아야 한다면, 그건 내가 되어야 했다. 나는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내가 무슨 행동을 취하기도 전에, 퀴리는 빠르게 걸어 제사장에게 향했다. "이봐!" "그렇다면 제가 남을게요." 나는 그녀를 멈추기 위해 손을 뻗었지만, 그 흉물들은 이미 퀴리를 자신들의 사악한 제물로 간택이라도 한 듯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내 팔을 잡으려고 하는 부랑자를 한 손으로 잡아 그대로 고꾸라트렸다. "비켜!" 이어서 뒤에서 양팔로 나를 붙잡으려는 녀석의 안면을 팔꿈치로 강타했다. 그것은 생선처럼 푸른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분위기는 삽시간에 험악해져, 괴물들은 당장에라도 나에게 덤벼들 기세였다. "괜찮아요. 그만 하세요." 퀴리는 발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여기 남으면 죽을 수도 있네!" "그러니 더더욱 교수님을 남길 순 없죠. 그리고 꼭 죽는다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런 간단한 게 아니야! 자네는...!" 결정적인 순간에 나는 망설였다.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내가 미래에서 왔다고? 미래에서는 퀴리 부인의 발견이야말로 인류를 위해 필요한 것이라고? 나는 끝내 결정하지 못했다. 나보다 그녀가 먼저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금 전에 교수님이 오시면서 해주신 말씀에 대해 생각해 봤어요." 나는 내가 했던 무책임한 말들을 떠올렸다. 내가 뭐라 했더라? 운석이 떨어진 게 기회라고? 그냥 되는대로 지껄인 소리에 불과했다. 나는 전생도 현생도 학자다운 일은 무엇하나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퀴리의 얼굴을 보고 그 무엇도 말할 수 없었다. 그것은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의 표정이 아니었다. "이 운석이야말로 제가 지금까지 찾아오던 것이에요. 후후, 그래요, 이건 교수님의 말씀대로 기회였어요." 그것은 위대한 발견을 목전에 둔 과학자의 창조적인 광기였다. 불 속에서 타오르는 나방만이 느낄 수 있는 쾌락에 젖은 환희였다! 퀴리의 진의를 깨달은 나는 그녀를 멈출 수 없었다. 잠시 후, 부랑자들은 떼거리로 나를 에워쌌고, 퀴리 부인의 뒷모습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철썩, 철썩. 그날 밤, 템스 강 유역의 제철소에 파도를 닮은 물결이 쉴 새 없이 강둑에 부딪혔다. 런던에서 살아온 지난 40년 동안, 템스 강이 이렇게 생기 넘치는 움직임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나는 뇌리에 남은 그 충격적인 이미지에 병적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런던의 모든 그림자는 그들의 발원지였으며, 템스 강의 물결은 모두 그들의 물장구였다. 내가 어디에 있으나 그것들에게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나는 내 귀에 끊임없이 맴도는 사악한 목소리를 끊임없이 되뇌었다. "부그라... 슈투운, 앙그라...." 나는 2시간 전, 템스 강 가장자리에서 발견되었다. 장시간 강물에 빠져 있어서 체온은 매우 낮았고, 템스 강물을 마신 탓에 위병까지 걸리고 말았다. 따뜻한 물로 몸을 데우는 동안에도 체온은 오르지 않아 몸은 여전히 시체처럼 차가웠다. 나는 덜덜 몸을 떨었다. 마리 퀴리, 그녀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단적인 의식 끝에 그들의 끔찍한 신에게 바쳐졌을까? 아니면 저들과 똑같은 흉물이 되어 녹색 운석을 찬양하고 있을까? 내 손에는 제대 이후로 한 번도 꺼낸 적 없었던 소총이 들려 있었다. 나는 그것을 거의 끌어안다시피 하고 있었다. 이 긴 철제 막대기는 그 어떤 십자가보다 마음의 위안을 줬다. "아후-아푼, 슈하탄 파탄...." "선생님, 무슨 혼잣말을 그리합니까?" 제철소장은 앉아 있는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의 손에는 번쩍이는 태그가 들려 있었다. "검댕은 전부 뺐습니다. 이게 뭐길래 오밤중에 그 난리를 친 겁니까." 그는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손에서 태그를 급하게 낚아챘다. 태그에는 다른 문장 없이 하나의 로고가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 로고를 어디서 쓰는지 알았다. 리치먼드 Co. 그것을 확인한 나는 그 자리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09. 제이콥 섬 그 후로 나는 열병에 시달렸다. 체온은 화씨 100도(*섭씨 38도)를 넘나들었고, 심한 구토감에 죽조차 삼키지 못하고 토해냈다. 마리는 따뜻한 물을 수건에 적셔 입가에 한 방울씩 짜서 흘려주었는데, 그런 보람도 없이 밤새 식은땀을 흘려 결국은 탈수증이 찾아왔다. 죽음에 있어서 나는 사랑하는 소녀나 마찬가지였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스틱스 강의 목전에서 산만하게 왕복하던 나는 기적적으로 회복했다. 고열로 앓아 누운 지 2주 만의 회복이었다. 내가 일어나 멀쩡한 모습으로 옷을 갈아입는 장면을 목격한 마리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울며 내게 매달렸다. 나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어안이 벙벙했다. "세상에, 주인님! 저는 주인님이 죽을 줄 알았어요!" "아무래도 과장이 심하군." "주인님이 며칠 누워있는지 모르셔서 그래요!" 열병에 시달리는 동안 의식이 혼미했던 탓에 나는 며칠이나 누워 있었는지 몰랐다. 하지만 마리의 얼굴이 반쪽이 된 것을 봐서는 하루 이틀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간 있었던 일들에 대해 물었다. 마리는 말을 더듬으며 그간의 고생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왕진 의사는 내일을 넘기기 힘들 것 같다는 말을 세 번 번복했으며, 변호사가 찾아와 내가 12년 전에 썼던 유서를 확인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가족 중에서는 둘째 형만 찾아왔는데, 어디서 구했는지 중국 도자기에 심은 하얀 난초를 가지고 왔다. 마리는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집에 돌아가지 않고 나를 돌봤다고 하니 감사한 일이다. 런던에서 그녀처럼 훌륭한 가정부를 구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아참, 그리고 이런 일이 있었어요." 그녀는 1주일 전쯤의 어느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말했다. 운석이 떨어진 날처럼 세찬 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빗소리가 들려, 혹시 내 방에 창문을 열어뒀나 확인하러 문을 연 마리는 기괴한 광경과 마주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고는 비바람을 맨몸으로 받고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밤하늘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시끄럽게 외쳤고, 그때마다 물안개 너머에 있는 어떤 존재가 대답하듯 뱃고동 같은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공포에 젖은 마리는 문을 닫고 도망치려 했으나, 미쳐 버린 내가 평생 비바람이나 맞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기에 방 안에 들어와 억지로 창문을 닫았다고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그녀의 충성심에 감탄했다.) 더욱 이상한 일은 다음 순간에 일어났다. 창문이 닫히자 내 몸이 실 풀린 마리오네트처럼 힘없이 늘어지더니, 애써 책상에 앉고는 그녀에게 펜과 노트를 요구한 것이다. 마리는 내가 시키는 대로 하며, 묽은 스프를 데워 함께 대령했다. 하지만 나는 식사에 입조차 대지 않고 무언가를 미친 듯이 기입했다는 것이다. "그건 불가능해." 나는 단언했다. 나는 그녀가 말하는 밤에 대한 어떤 기억도 없었고, 그 밤으로부터 다음 날도, 다음다음 날도 고열로 앓으며 움직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정말이라니까요! 이걸 보세요!" 그녀는 억울해하며 내가 적었다고 주장하는 노트를 내게 건넸다. 노트의 표지에는 이런 제목이 적혀 있었다. 「흑천복음(The Gospel of Blackriver)」 그것은 분명 내 필적이거나, 누군가 내 저서를 보고 교묘하게 본뜬 글씨체임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나조차 구분할 수 없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뭐라 적혀 있지? 읽어봤나?" "아니요. 아무래도 불길하게 느껴져서...." 나는 첫 장을 넘기는 순간, 내 노트를 뒤져보지 않기로 한 마리의 충직함에 감사했다. 그것은 서장부터 내가 믿고 있는 유일한 신에 대한 모독과 저주를 은밀한 태도로 고백하고 있었다. 마치 그것이 숨겨온 내 본심인 것마냥 말이다. 또한, 양을 살아 있는 채로 해체하여 제물로 바치는 과정에 대해 11페이지에 걸쳐 상세히 묘사했으며, 그에 관련된 3가지 주문의 양식과 절차가 쓰여 있었다. 다음 15페이지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외설스러운 산문이 내 경험담처럼 쓰여 있었다. 페이지의 1/3은 매번 식은땀으로 젖어 있어 번진 잉크 때문에 알아볼 수 없었고, 뒤로 갈수록 흘린 피가 늘어났다. 내 손에 수없이 난 자상의 원인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날카로운 잉크 촉으로 자해한 것이었다. 이 얇은 노트의 광기는 마지막 장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피로 쓰인 문자는 내가 제이콥 섬에서 보고 들은 것들, 그 흉물스러운 존재들이 입에 담았던 모든 말이 상세히 적혀 있었다. 내 기억이 끊긴 시점부터는 끝도 없이 괴물들이 사용하던 언어가 적혀 있었는데, 나는 어째서인지 그것이 그들의 기도문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식은땀을 닦아냈다. 이 불경스러운 일지는 누구도 읽어서는 안 된다. "방금 그 얘기, 누구에게도 하지 말도록." 나는 서랍을 뒤져 체인과 작은 책 상자를 찾아내고, 마리가 보는 앞에서 노트를 상자 안에 넣고 체인을 걸어 잠갔다. 상자는 내가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열어볼 수 없을 것이며, 훗날 변호사를 불러 내가 죽은 후에는 함께 소각하도록 유서를 고쳐 쓸 것이다. "그게 뭐길래 그런가요?" 마리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안구 표면에는 그녀가 본 폭풍우 치는 밤의 광기가 다시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속여 안심시킬지, 어느 정도 사실을 공유할지 고민했다. "내 개인적인 치부일세. 어쩌다 이런 것을 적었는지 모르겠군." 이것은 누군가와 공유해서는 안 되는 지식이었다. 특히나 그녀는 충직함의 대가를 누릴 자격이 있었다. 바로 무지라는 축복 말이다. 그 순간, 나는 내가 군인 시절 품었던 자부심의 정체를 이해했다. 나는 그녀와 같은 무고하고 선한 자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해야 하는 일은 여느 때보다 선명해졌다. 어설픈 변명이었지만 마리는 더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수은 체온계를 내 몸에 가져다 댔다. "나는 멀쩡해." "그래도 열이 내려야 확실히 낫는 법이에요." 마리는 체온계 눈금을 읽어 나갔다. "화씨 95도? 몸이 얼음장 같으시네요." "줘보게, 고장 난 거 아닌가?" 다시 체온을 재봐도 결과는 똑같았다. 섭씨로 따지면 35도 언저리로, 정상과는 거리가 먼 체온이었다. 하지만 내 몸은 그 어느 때보다 건강했다. 나는 체온계가 고장 났다고 판단했다. "한동안 집에서 요양하시는 게 어떠신가요?" "일이 잔뜩 밀렸네. 오늘이 며칠이지?" "5월 31일이네요." 나는 눈을 껌뻑거렸다. "31일? 확실한가?" "네. 왜 그러시나요? 중요한 약속이라도 있으신가요?" 나는 옷걸이에 있는 코트를 급하게 껴 입었다. 마리는 얇은 손으로 바지에 말려들어간 코트 끝을 꺼내줬다. "오늘이 바로 리치먼드와 은랑백의 공판일이네." 재판이 끝나면 진실을 밝혀낼 기회가 영영 사라진다. 운석은 은랑백과 리치먼드, 둘 중 하나의 손으로 넘어가고, 섬은 두 사람의 계획에 따라 이전과 전혀 다른 것이 될 터였다. 퀴리 부인을 구할 기회 역시 영영 사라질 것이었다. 나는 지팡이를 꽉 움켜쥐었다. "나가실 거면 꼭 우산을 가지고 가세요." 그런 나를 보며 마리가 당부했다. "비가 아주 많이 오거든요." 창밖에는 거센 비바람이 불어치고 있었다. 운석이 떨어진 날과 똑같았다. 늦은 아침. 나는 은랑백의 집무실에 있었다. 모든 것이 가지런히 정돈되었으며, 무엇하나 쓸모를 하지 못하는 물건이 없는, 그야말로 주인의 성품이 엿보이는 검소한 집무실이었다. 은랑백은 글라스의 반을 채운 와인을 입에 머금었다. "조식과 석식 이후, 글라스의 1/3 정도 레드 와인을 따르고 거기에 식초 두 스푼. 그렇게 위를 씻어주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지." 그는 입을 열지도 않았으면서, 콧수염도 적시지 않고 잔을 비웠다. "강물에 빠져 열병에 걸렸다고 들었네." "운이 나빴습니다." "아니, 운이 좋았다고 봐야지. 템스 강에 빠지고도 목숨을 건졌으니 말이야." 잔을 옆으로 치운 은랑백은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다리가 없는 나만큼이나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창가를 바라보며 중얼였다. "허버트 남작도 젊을 적에 템스 강에 빠진 적이 있는 걸 아는가?" "몰랐습니다." "그렇겠지. 득남하더니 뻔뻔한 얼굴로 엄격한 아버지 행세를 했거든." 나는 그가 그런 얘기를 하는 의중을 파악할 수 없었다. 업무를 다루는데 사사롭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 백작이 친구의 아들을 눈앞에 뒀다고 마음에 없는 말을 할 것처럼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서두가 길었군. 그래서, 그 골프 가방은 이번 건과 관계가 있나?" 은랑백은 내 쪽으로 고개만 돌려 쳐다보며 물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등에 골프 가방을 메고 있었다. 한참 영국에서 인기를 끄는 스포츠였지만, 물론 나는 왼다리 때문에 제대로 골프를 쳐본 적이 없었다. 안에 있는 것이 골프채는 더더욱 아니었다. 스나이더 엔필드 소총. 가방 안에 든 낡은 소총을 꺼냈다. 제대 이후로도 애착을 가지고 꾸준히 정비했지만, 아무래도 세월을 이겨낼 수는 없었는지 나만큼 늙은 총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총알 정도는 내보낼 줄 알았다. 나는 총구를 돌려 은랑백을 겨냥했다. "무슨 장난인가?" "장난도 뭣도 아닙니다. 백작님께서는 무고를 증명해주셔야 할 겁니다." "자네, 미쳤나!" 그렇다, 나는 미쳤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일로, 지독한 열병에 시달려 광기 어린 글을 쓰기 이전에, 제이콥 섬에서 어인과 마주하기 이전에, 프랑크 저택의 잔혹한 비밀을 알기 이전에, 외딴 사르데냐 섬에서 있었던 일이다. 거기서 나는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일 수 있을 만큼 미쳤다. "섬과 운석에 대해 숨기고 있는 것을 전부 말해주셔야 합니다." "제정신이 아니군... 제정신이 아니야...." 은랑백은 충격받은 듯이 몇 번이나 중얼였다. 그의 주름진 주먹이 배신감에 파르르 떨렸다. "뭐가 목적이지? 리치먼드 그 쥐새끼의 사주인가?" "저에게 명령할 수 있는 것은 저 자신과 여왕 폐하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사랑하는 고국과 도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겁니다." 백작의 얼굴로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충격, 공포, 망설임. "허튼소리치고는 담력이 좋군. 언젠가 누군가에게 고백하는 날이 올 거라 생각했지. 자네가 무엇을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나도 여왕 폐하를 섬기는 종으로서 말해주는 수밖에." 그 끝에, 그는 허무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목소리에는 어떤 진실된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이것은 우리 가문의... 아니, 나 개인의 치부라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40년 전, 나의 아버지, 윌리엄 에식스 백작께서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셨네. 오늘처럼 많은 비가 내리던 날이었지." 말하던 은랑백은 빗물이 흐르는 창문을 응시했다. 자신을 겨누고 있는 소총의 존재마저 잊은 사람 같았다. "사고였네. 윌리엄 백작께서는 템스 강에 떨어졌고, 빗물이 만든 급류는 그분을 바다로 끌고 갔지. 두 달을 수색했지만, 장례를 위한 시신조차 우리에게 돌아오지 않았어." 그의 마르고 주름진 손이 창문을 쓸었다. "어머니께서는 실의에 빠져 앓다가 1년 뒤 치매가 찾아와 강으로 뛰어들었네. 아버지를 찾아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그렇게 그녀는 떠났지. 나는 두 이별을 마주할 준비가 전혀 되지 않았지만, 변호인은 담담한 어조로 내가 물려받아야 마땅한 유산을 읊었네. 백작위, 나의 권리와 재산, 그리고 의무 같은 것들 말이네." 창문에 비친 늙은 백작의 눈에는 만감이 교차했다. 슬픔과 그리움, 그리고 분노. "그중에 그 섬이 있었네. 제이콥 섬. 아버지를 수장시킨 그 저주받을 섬." 은랑백은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의 죽음을 수상하게 여긴 자는 나뿐만이 아니었지. 운 좋게도 나는 몇몇 유능한 협력자를 얻을 수 있었어. 그중에 자네 아버지도 있었네. 허버트 남작은 아주 유능한 탐정이었지. 우리는 몇 년에 걸쳐 조심스럽게 섬을 조사했고, 끝내 진실에 도달했다네." 백작의 눈이 번뜩였다. "나의 아버지는 살해당한 거야. 그 무례하고 끔찍한 부두 노동자들의 손에!" ───쿠릉! 쿠르릉! 번개가 내리치며 실내가 암전되었다. 창 밖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벼락을 맞은 목재 전신주는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끊겨 나간 전선으로부터 하얀 전기의 섬광이 튀었다. "그들은 몇 번이나 아버지를 찾아와 항구 임대료를 타협하려 했지. 하지만 그때마다 완강한 아버지가 거절하자 노선을 바꿔 한 공장주와 손을 잡았지. 그들은 템스 강의 급류가 거센 날을 기다려, 아버지를 섬으로 불러들인 뒤 살해했네." 나의 눈에는 이형의 존재들이 보였다. 기이할 정도의 유대감을 지닌 그들이 정말로 변이된 후에 그런 유대감을 가지게 된 것일까? 아니면, 일평생 죄를 공유한 자들의 업인가. "노동자들은 그 사악한 행위의 대가를 요구했지만, 공장주는 말을 바꿔 그들이 백작을 살해한 증거를 고발하겠노라 협박하며 그들을 노예처럼 부렸지. 몇몇은 후회하고 나를 찾아와 용서를 빌었지만 나는 그들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어." 실내의 불빛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둠 속에 보이는 것은 귀기 어린 백작의 눈뿐이었다. 나는 총구를 올렸다. 이 어둠 속에서 맞출 수 있는 표적은 백작의 머리밖에 없었다. "나는 복수를 맹세했네. 이 한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그 타락한 자본가와 섬 전체에 파멸을 내리겠노라 저주했네." 백작은 웃기 시작했다. 허탈한 실소였다. "공장주는 이미 죽었네. 사고였네. 비 오는 날, 템스 강에 빠져 죽었지." 그는 실성한 듯이 웃어 재꼈다. 연로한 폐로 너무 웃은 나머지 숨을 헐떡이며 침을 토해냈다. 그 숨소리는 마치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처럼 들렸다. "공장주가 남긴 모든 유산도 파괴되고, 남은 건 난개발로 오염되고 침식되고 있는 외딴 섬뿐이었네. 비가 올 때마다 섬은 조금씩 잠겼지. 아주 많지도, 적지도 않게, 그들이 죄를 깨닫고 뉘우칠 만큼 느긋하게 침강했지. 건물이 가라앉고 있다며 재개발을 요구하는 주민의 탄원서를 몇 번이나 받았지만 나는 모두 벽난로에 던져넣고, 대신 관리들에게 웃돈을 쥐여주며 지도를 작성할 때마다 그 지역을 누락시켰네." 나는 그제야 그 기이한 거리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1층이 없는 건물들과, 지도와 다른 거리 모두 운석과는 무관했다. 그 모든 것은 백작이 쓴 복수극이었던 것이다. "공들인 복수는 곧 끝날 예정이었어. 그 저주받을 섬과 종자들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러했듯, 템스 강의 물결에 쓸려갈 운명이었지. 그런 와중에 그 녀석이 나타난걸세." "휘트니 리치먼드." 백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자는 가지고 있을 리가 없는 섬의 개발권을 주장하며 나섰고, 그건 나에게 최악의 상황이었네. 질 리가 없었지만, 만에 하나 패소하게 되면 모든 걸 잃을 상황이 된 거야." "그가 개발을 위해 제이콥 섬을 조사하면, 지난 수십 년간 측량 결과와 실제가 얼마나 다른지 드러날 테고, 백작님의 부정도 밝혀질 테니 말이죠." 내 담담한 추측에 은랑백은 인자하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미소는 내 영혼에 상처를 입혔다. 나는 인간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에 공포마저 느꼈다. "아니야. 만약에 그자가 섬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면, 섬이 가라앉지 않게 되잖나?" ───투둑 투툭.... 정적에 휩싸인 방 안에 빗소리만이 허무하게 울렸다. 직전까지 공간을 지배하던 열광적인 광기는 식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삶의 동력을 잃은 노인이었다. "이 죄는 주님 앞에서 고하게 될 것이라 생각했건만, 허버트의 자식에게 모든 것을 고백할 줄이야. 주께서 짜놓은 계획은 정말로 인간이 모를 것이구나...." 은랑백은 말을 시작하기 전보다 훨씬 연로한 모습이었다. 몸 전체를 두르고 있던 날카로운 기세는 완전히 마모되어, 일흔이라는 나이에 어울리는 주름지고 연약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거진 20년의 세월을 10분 만에 맞았으나, 표정은 전보다 편안해 보였다. "원하는 대답은 찾았나? 이제 나를 고발하고 그 죄인들을 구할 텐가?" "결국 당신께서는 운석에 관여한 것이 없군요." "죽은 자네 아버지의 이름에 맹세코, 나는 이 이상 숨기는 게 없네." 나는 소총을 내려놓고, 코트 안주머니는 뒤져 철제 태그를 꺼냈다. "기뻐하십시오, 백작님. 당신의 복수는 성공했습니다. 그들은 죽음보다 끔찍한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당신이 아닌 어떤 자의 실수에 의해서 말입니다." "리치먼드...." 리치먼드 Co. "당신께서 말씀하신 대로 리치먼드는 사기꾼입니다. 그가 운석 낙하 일주일 전에 땅을 샀을 리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운석이 그 자리에 떨어진 건 우연이기 때문이죠." "그게 무슨 말인가?" 나는 어렴풋이 이 재판의 진상을 깨달았다. "그는 애초에 승소할 생각도 없었습니다. 대신, 땅의 적법한 소유자인 백작님께서 운석에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운석의 채굴권 같은 터무니없는 소송을 건 겁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것을 되찾을 시간이 필요했을 뿐입니다." 나는 손목시계를 살폈다.시침은 마침 정오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그 말대로라면 마치...." 백작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운석의 주인은 리치먼드입니다. 그리고, 제이콥 섬의 모든 관계자가 재판에 주목하는 이 순간이야말로, 그가 줄곧 기다려온 시간이겠죠." 재판이 시작되기 1시간 전이었다. 전툴루 관련\전툴루_09. 제이콥 섬_폭풍우 치는 밤, 셜리 마리.jpg 10. 위대한 템스 강 ────콸콸콸! 템스 강은 분노한 듯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비가 와도 범람한 적 없었던 강둑은 무용지물이 되어, 오수는 도로까지 침범해 쏟아졌다. 레인 코트를 쓴 노동자들은 항만 끝에 엉거주춤 선 채로 작업을 계속했다. "배는 안 나오는가?" "이 날씨에 미쳤습니까!" 나는 욕설을 중얼거리며 발을 돌렸다. 시간 낭비했다. 혹시나 배라도 빌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 것인데, 당연하지만 이런 날씨에는 가장 큰 선박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차도, 자동차도 다니지 않았기에, 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한산했다. 천둥소리에 놀란 말이 넘어지기라도 하면 참사가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그 때문인지, 런던 시내에 늘 보이던 말똥이나 휘발유 기름때도 보이지 않았다. 바다 내음이 났다. 언제나 코를 시큰거리게 하던 런던 특유의 악취는 비바람에 씻겨나가고, 동쪽으로 30km 넘게 떨어진 바다 특유의 소금기가 런던 상공을 점유했다. 냄새는 바다와 도시의 경계를 허물었다. 나는 환시를 봤다. 빅 벤과 버킹엄 궁이 밀물에 잠기고 있었다. 그것은 먼 과거인 동시에 머지않은 미래의 풍경이다. 1억 년 전, 대륙은 아직 다 나뉘지 않았고 지면은 끝없이 침강과 융기를 반복했다. 그 당시 런던은 해저 깊숙이 잠겨 있었고 이 땅의 원래 주인은 어인이었다. 그들이 만든 흉측한 장식물은 여전히 영국 곳곳에 남아, 당시 태어나지도 않은 인류의 멸망을 예언했다. 대지가 정립되고 인간이 뭍 위에 선 뒤, 그들은 바다로 떠났다. 하지만 조바심내지 않았다. 땅은 언젠가 다시 물 밑으로 가라앉고, 그때 인간은 살기 위해 어인에게 빌며 가축을 자처할 테니 말이다. 21세기에서 온 나는 그 예언이 사실임을 안다. 해수면은 지난 수천 년간 멈추지 않고 상승해왔다. 그리고 앞으로 100년, 200년 뒤에, 런던은 바다에 잠길 것이다. 여왕의 거처는 그들의 사악한 신을 위한 제단으로 바뀔 테고, 국회의사당은 인간을 사육하는 양식장으로 쓰일 것이다. 어인은 그들의 오랜 영토를 되찾고, 인류를 악으로 다스릴 것이다! 마르스! 그들이 섬기는 악신이야말로 마르스다! 나는 악몽 같은 환각에 헤엄쳤다. 누가 어떤 의도로 나에게 이런 환시를 보여주는가, 나는 신음하며 비틀거렸다. 지팡이가 빗물에 미끄러져 바닥을 굴렀다. "선생님, 괜찮습니까?" 한 젊은 순경이 내가 넘어지는 모습을 보고 서둘러 달려와 부축했다. "위험합니다, 자택에 돌아가시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순경의 부축에 일어나며, 문득 하늘이 보였다. 검게 물든 하늘에서는 아침부터 내리던 빗물은 더욱 세차게 쏟아져 세상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1000년 전까지, 인류가 신의 분노라고 믿었던 그 하늘이었다. "나는 가야 하네." "어디 가십니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나는 외쳤다. "제이콥 섬!" 모든 비극이 시작되고, 런던의 멸망이 시작될 그곳! ────쏴아아아! 제이콥 섬의 입구에 도착한 것은 1시간 30분 무렵이었다. 마차가 다니지 않은 탓에 예정보다 30분 늦은 시간이었다. "정말 여기가 맞습니까?" 순경은 불안한 듯이 물었다. 순경이라고 해도 이런 빈민굴에 다가오는 일은 많지 않았다. 가장 경험 많고 잔인한 경관만이 이런 빈민굴에 배치되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날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관들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이 태업한 것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바닥에 짙게 깔린 혈흔이 그 증거였다. "벌써 지나갔군." 혈흔은 그대로 템스 강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살해된 뒤, 템스 강에 버려진 것이다. 흔적을 지울 필요도 없었다. 앞으로 한 두 시간이 지나면, 모든 혈흔이 그대로 빗물에 씻겨 사라질 테니까. "핏자국...!" 젊은 순경은 깜짝 놀라며 혈흔을 향해 다가갔다. "놀라지 말게. 지금부턴 더한 걸 볼 테니까." 그는 쭈그려 앉은 채 핏자국이 빗물에 쓸려나가는 의미 없는 광경을 내려다봤다. 나는 그 틈에 가방에서 소총을 꺼내고, 빗물이 총구로 스며들지 않도록 총신을 아래로 낮췄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 ...! 선생님, 그건 대체!" "스나이더 엔필드라네. 연식은 꽤 있지만 아직 쓸만하지. 나처럼 말이야." "그런 질문이 아니잖습니까!" 아무리 총기가 허용된 영국이라고 해도, 그걸 시내 한복판에서 꺼내는 것은 별개였다. 순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내게 다가왔다. 마음만 먹으면 쏴버릴 수 있을 만큼 무방비한 동작이었다. 경험 부족. 나는 그렇게 판단했다. "데려다 줘서 고맙네. 돌아가게." 아무래도 그는 이런 일에 끌어들이기에 너무 젊었다. 런던을 위해 누군가의 피가 필요하다면, 그건 어른의 것이 되어야 했다. "그런 말로 넘어갈 상황이 아닙니다. 지금 당장 모든 상황을 설명해 주셔야 할 겁니다." 나이에 안 어울리게 고지식한 규칙을 읊어오는 순경을 향해 나는 빅토리아 훈장을 꺼내 보였다. 말로 설득할 자신도 없었고, 아무래도 시간이 부족했다. 이것이야말로 내 신원과 지금 상황에 대한 가장 직관적인 해설이었다. "런던은 공격받고 있네, 순경." 군 훈장을 가진 퇴역 군인, 낡은 군용 소총, 공격당한 경관들. 훈장을 알아본 순경은 지금 상황이 평범한 것이 아님을 눈치챈 듯했다. "또한, 이건 어떤 영광과도 거리가 머네. 고국과 여왕 폐하를 위해 순직할 준비가 됐나?" 나는 그를 재촉하지도, 책망하지도 않았다. 대신, 눈을 내리깐 순경을 지나쳐 제이콥 섬 안쪽으로 향했다. "저, 저도 가겠습니다. 선생님 혼자 보낼 순 없습니다!" 나는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름이 뭔가?" "피터입니다. 피터 윌슨입니다." "필레몬 허버트일세." 마음 같아서는 젊은 그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지만, 도움을 마다할 만큼 여유로운 상황은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환시에 시달리고 있었다. 런던이 가라앉는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나는 무엇이라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거리는 이전에 방문했을 때와 사뭇 달랐다.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냄새였다. 런던 거리와 제이콥 섬을 명확히 구분 짓던 악취의 벽은 사라졌다. 남은 것은 소금기 쩔은 바다 내음뿐이었다. 이미 런던과 제이콥 섬의 구분은 무너지고 있었다. "여기가 정말 런던이 맞습니까?" 윌슨이 주변을 둘러보며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정을 모르는 그가 불안해하는 건 당연했다. 전말을 알고 있는 나도 2주 전과 비교해, 지면이 얼마나 더 침강했는지 깨닫고 전율했으니 말이다. 적어도 당시에는 2, 3층 정도 높이였던 건물들은 더더욱 가라앉아, 거의 진흙탕에 파묻혀서 원시적인 움막처럼 보였다. 도로는 또 어떠한가. 그래도 돌 바닥이 깔렸던 도로는 이미 진창에 잠겨, 매 걸음마다 발목까지 파고들었다. 진창 위로는 벌레인지 생선인지 모를 이름 모를 원시 생물이 펄떡거리며 기어 다녔다. "우웩!" 전신주와 가로등은 전부 쓰러져 물길 끝에 너저분하게 방치되어 있었고, 그 옆에는 쓸려온 거대한 물고기 주검이 수십 구나 방치되어 있었다. 윌슨은 그 역겨운 광경에 구토했다. 비위가 강한 나마저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다가가 주검을 살폈다. 정확히 말하면, 그건 아직 사람이었다. 2주 전에 봤던 것보다 훨씬 더 어류에 가까운 그것들의 몸에는 벌써 파리가 까놓은 구더기 알이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나는 가급적 손을 대지 않고 지팡이만으로 뒤적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그것은 대량의 혈액을 잃고 바짝 말라 있었는데, 출혈부는 가슴에 뚫린 총상이었다. "혼자서는 이렇게 못 하지." 나는 수십 구나 되는 주검을 돌아봤다. 그것들은 마치 줄을 서듯이 일정한 간격으로 이어져 있었고, 이런 형태는 오직 일제 사격만이 만들 수 있었다. "이 괴물들은 다 뭡니까?" "죄인들이네. 한 노인의 저주를 받아 이런 모습이 됐지." "그건... 무슨 농담입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수백 마리의 괴물 생선과 총으로 무장한 무장 폭도를 상대할 준비는 됐나?" "아니요...." "마침 나도 그러네." 예상대로 리치먼드는 이곳에 왔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그의 곁에는 총화기로 무장한 여러 명의 용병이 있다. 나는 그 사실이 끔찍하게 싫은 동시에 어떤 위안을 느꼈다. "윌슨, 부탁이 있네. 섬 어딘가에 있는 여인을 찾아야 하네. 나는 다리가 불편한 탓에 할 수 없네. 자네가 할 수 있겠나?" 나는 그에게 퀴리의 이목구비에 대해 전했다. 윌슨은 불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떠났다. ────탕! ────탕! 탕! 리치먼드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이 거센 빗소리 사이로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비명과 화약 터지는 소리를 따라가면 될 뿐이었다. 그는 예상과 다르지 않게 제이콥 섬에 있었다. "전부 죽여!" "역겨운 괴물 놈들!" 소총과 심지어 기관총까지 동원해 무장한 여섯 명의 용병이 욕설을 내뱉으며 도망치는 어인을 쏘고 있었고, 리치먼드는 안전한 거리를 두고 태연하게 그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허버트! 강물에 빠졌다고 들었는데, 용케 살아 있었군그래!" 내 모습을 알아본 리치먼드는 능청스럽게 금니를 드러내며 인사했다. "그래서, 지금쯤 법원에 있을 네가 왜 여기 있지?" "법원에는 아무도 가지 않았습니다." 내 대답에 리치먼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당신이 그랬듯이, 저도 은랑백도 말이죠." "자넨 성가실 정도로 유능하군." "그걸 기대하고 절 찾아온 게 아닙니까?" 리치먼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있나. 나는 자네가 백작과 친분이 있다고 하길래, 거짓말 좀 섞어서 속물적인 제안을 하면 어떻게든 그가 승소하게 하려 할 줄 알았지. 2주일 동안 런던 도서관에 틀어박혀 먼지 묵은 법률서나 뒤적거리면서 말이야." 그는 자기 생각대로 일이 굴러가지 않은 것에 대해 불평하듯 말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낙천적인 어조였다. "자네가 그날 바로 제이콥 섬에 방문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자넨 상상도 못할 거야." "운석을 되찾으러 온 겁니까?" 직전까지 눈웃음 짓고 있던 리치먼드가 정색했다. "거기까지 알고 있다면 알겠지만, 그건 원래 내 물건이야." "저건 인간의 물건이 아닙니다." "그래, 나는 인간이 아닌 존재에게서 이걸 훔쳤네." 리치먼드는 담담히 고백했다. "25년 전, 나는 아메리카로 향하는 배 위에서 자살을 시도했네. 사업에 실패하고 진 빚 때문이었지. 미국에서 평생 일해도 빚을 갚을 전망이 보이지 않더군, 그래서 대서양 한가운데로 투신했네. 하지만 마지막에 무슨 행운이 닿았는지 나는 죽지 못하고 살아남았지." 들어본 적 있는 이야기였다. 그의 복잡한 채무 관계는 신문에서도 종종 다뤄지는 이슈였다. "나는 이상한 섬에 도착했네. 아니, 그건 대륙이었어. 밀물에 잠긴 대륙이었지. 얕은 바닷물에 잠긴 그 광활한 갯벌은 끝도 없이 이어져 지평선을 뒤덮었고, 그중에 내 무릎보다 높게 올라오는 굴곡이 없었네. 자라는 생물은 무엇 하나 없었고 모든 것이 죽어 부패하는 땅이었지. 물 위에 비추는 것이라곤 나 자신과 푸른 하늘 뿐이었네." 리치먼드의 얼굴이 환희에 젖었다. "거기서 발견한 거야, 그 신비하게 빛나는 녹색 운석을. 어떤 사악하면서도 원시적인 종족이 숭배하던 것이지." 그는 원시적인 종족을 강조하며 눈을 돌렸다. 그의 시선 끝에는 총기 앞에 무력하게 죽어나가는 어인이 놓여 있었다. "미국의 상선에 구조된 나는 곧장 런던으로 돌아왔네. 내 손에는 운석이 들려 있었고, 이걸로 나는 무엇이든 해낼 힘이 있었네. 우연찮게도, 나에게 빚을 받을 채권자들은 모두 불운한 해난 사고로 실종되었고, 덕분에 나는 사업을 키울 시간을 벌 수 있었지." 그렇다. 그를 따라다니는 무성한 소문의 근원은 여기서부터 시작했다. 그 복잡한 채권 관계는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고 있었다. "충분히 사업이 궤도에 오르고, 나는 모레턴이라는 시골 마을을 사들였지. 바다와 떨어진 조용한 마을이었네. 나는 그곳에 공장을 짓고 사람들에게 일감을 줘서 구원했지. 이 정도면 훌륭한 미담 아닌가?" "운석이 제이콥 섬에 떨어진 건 설명되지 않는군요." 내 질문에 리치먼드는 갑자기 소리 질렀다. "내 운석은 도난당한 거야! 한밤중에 내 처소에 들어온 저 비열한 생선들에 의해서! 언젠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준비한 덕에 대부분 그 자리에서 쏴죽였지만, 몇 놈을 놓치고 말았지! 나는 평생에 걸려서라도 그 열등한 종족을 박멸하고, 내 운석을 되찾고자 맹세했네!" 기관총 불빛에 비친 리치먼드의 눈에는 선명한 광기가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2주 전, 마침내 놈들이 숨어 사는 프랑스 해안 마을을 발견하고 일망타진했지. 운석이 다시 내 품에 돌아오는 그 순간까지 더는 기다릴 수 없었어." 폭풍우 치는 밤의 무리한 비행. 나는 그것을 강행하도록 요구한 것이 리치먼드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비행기는? 이 시대에 존재할 리가 없는 기술에 대해서 그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운석은 내 거야! 부랑자 새끼들이 가질 게 아니라, 내 거란 말이야!" ────부우웅.... 물안개 너머에서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Yjzuq'hacha Fhanglu Fhtagn!" "IA! IA! Tekeli-li Dagon Fhtagn!" 분위기가 바뀌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학살의 현장에서, 비명을 내지르던 어인은 광신적인 기도문을 외쳤다. 그것들은 스스로 총탄을 향해 뛰어들었다. 비늘이 갈라지고 머리가 터져나가도, 바로 뒤에 다른 어인이 나타났다. "IA! IA! Tekeli-li Dagon Fhtagn!" "IA! IA! IA! IA!" 비정상적인 행동과 반대로 이들은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은 어류 특유의 눈으로 인간들을 응시했다. 입은 작게 오므라져 먹이를 눈앞에 둔 생선 같았다. ───탕! 탕! 탕! 탕! "사장님, 도망쳐야 할 것 같습니다!" 공포에 질린 용병 한 명이 외쳤다. "안돼! 쏘란 말이야, 머저리들아! 고작 부랑자 새끼들을 못 막겠단 말이야?" 리치먼드는 발을 구르며 외쳤다. "어어?" 마침내 한 용병의 머리에 어인의 손이 닿았다. 그는 머리채를 잡힌 채, 바닥을 뒹굴었다. 그를 구하기 위해 원호 사격이 이어졌지만, 용병을 붙잡은 어인들은 몸을 숙이고 빠르게 그들이 왔던 장소로 돌아갔다. "도와줘! 도와줘! 아아아아!" 어인들은 과시하듯 눈앞에서 붙잡힌 용병을 해체했다. 그건 고문이었다. 그것들은 붙잡힌 용병이 몸에서 모든 피를 짜내고 죽기 전까지 그에게 고통을 줬다. 용병이 죽을 때, 이목구비 중 남아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무감정한 어류의 눈에는 한 가지 공통된 감정이 존재했다. 분노, 복수. 용병들은 겁에 질려 달아나기 시작했으나 이미 늦었다. 차라리 뒤로 자빠져 머리가 깨져 죽은 자는 행복한 편이었다. 광기 어린 전투의 끝이 다가온다. 리치먼드는 직접 총을 들고 개머리판으로 어인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꺼져! 내 몸에 손대지 마!" 어인의 지느러미에 붙잡힌 리치먼드가 발버둥쳤다. 어인은 리치먼드와 수십 구나 되는 동료의 주검을 끌고 강으로 향했다. 부랑자들은 이미 인간보다 생선에 가까운 존재가 된 것이다. 리치먼드가 끌려간 물속에서 부글거리는 거품이 올라왔다. 모든 것이 끝났다. 세상이 적막에 휩싸였다. 직전까지 있었던 지옥의 한 장면 같던 전투가 끝나고, 소름 돋을 정도로 한기가 올라왔다. ────부우웅.... 나는 물안개 속에서 어떤 존재를 마주했다. 런던의 어떤 건물보다 거대한 그것은 템스 강 위에 우뚝 선 채로 이곳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갯속에서도 선명한 두 눈은 해저 생물 특유의 무기질적인 정서를 담은 채, 런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악... 학...." 그 존재를 눈치챈 나는 뭍에 올라온 생선처럼 숨조차 쉬지 못한 채 헐떡였다. 한 번의 날숨을 쉴 때마다 바다 곰팡이와 기생충 배설물 악취가 지상을 휘감았고 뱃고동 소리가 런던 전역을 울렸다. 아아, 그래, 비행기는 악천후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말 그대로 아주 강한 힘을 가진 무언가 손가락 끝으로 날개를 잡아당긴 것이다. 그 존재를 올려다보며 나는 질식했다. "허억... 허억... 허억...." 제이콥 섬은 운석과 함께 가라앉고 있었다. 나 역시 가라앉을 것이다. 숨을 쉬기 위해서는 바다로 돌아가야만 한다. 모든 생명이 그러하듯이, 바다로 돌아가야만 한다. "선생님! 선생님! 정신 차리십시오!" 윌슨이 나를 일으키며 외쳤다. 저 눈! 눈! "아아아아악!" 나는 비명을 지르며 윌슨의 눈알을 파내려 했다! "안갯속에! 안갯속에! 그가 온다! 바다로! 바다로! 바다로!" 일주일 후, 나는 침대 위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이번 사건이 내 정신에 미친 여파는 끔찍했으나, 불행하게도 나는 미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나는 하루 대부분 시간을 공포를 이겨내는데 써야 했고, 비가 오는 날마다 발광했다. 책과 신문은 공포를 외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세간의 이목이 모였던 운석 재판은 관계자 누구도 참석하지 않는 희대의 사건으로 흐지부지되었다. 이의를 제기할 리치먼드마저 실종되었으니 누구도 이 재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사실 어떤 판결이 나와도 의미 없었을 것이다. 제이콥 섬도, 운석도 모두 템스 강 아래로 가라앉아 사라졌으니 말이다. 세간은 바로 다른 이슈에 주목했다. 상속자가 없는 리치먼드 Co.를 채권자들이 어떤 식으로 나눠 가질지에 대한 치열한 법정 공방이 이어진 것이다. 그 때문에 모레턴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의 주민이 하룻밤 사이에 전원 증발한 사건은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다. 대신 지역 신문에서 짤막하게 다뤄질 뿐이었다. 런던 경기는 태풍 이후로 연일 최악을 기록하고 있었다. 템스 강에 더 이상 배가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물길이 거세진 것이다. 태풍 당일 정박했던 배와 수백만 파운드의 가치를 가진 화물이 수장됐고, 곳곳에 설치된 항만 시설은 모두 무용지물이 되었다. 런던 최악의 날이었다. 요양하는 와중에, 두 통의 편지가 날아왔다. 한 통은 은랑백의 부고를 알리는 편지였다. 사람들 말로는, 그가 하루아침에 3~40살 가까이 나이를 먹더니 그 다음 날 노환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그의 평소 식습관이 밝혀지며 식초와 레드 와인을 섞으면 몸에 안 좋다는 속설이 돌았다. 다른 한 통은 윌슨에게 온 편지였다. 그는 몇 가지 안부 말과 함께 노트 한 권을 보냈다. 첫 장에는 이런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리 퀴리」 나는 그것을 읽는 것을 잠깐 보류하기로 했다. 그녀는 과연 강으로 갔을까, 아니면 죽었을까. 나는 그 대답을 아는 것이 너무 두려웠다. 창 밖에는 여느 때처럼 템스 강이 흐르고 있었다. 템스 강은 지난 100년 중 그 어느 때보다 깔끔했다. 강은 언젠가 본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강이 늘 그러하듯, 언젠가 생명이 넘치는 푸른 바다가 될 것이다. 나는 샤워할 때마다 하수도 밑으로 무언가 지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바다로 가지 못한 그들은 런던의 하수도에 살고있는 것이다. 나는 강이 바다가 되는 순간, 그들이 복수를 위해 뭍으로 올라올 것을 직감했다. 그 순간 나는 영국 군인으로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매일 고민이 깊어지는 밤이었다. 11. 엽기! 런던에 늑대인간 나타나다! 지난 6개월간 일어난 몇 가지 사건에 휘말리며 내 정신은 한계에 달했다.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내가 알고 있었던 크툴루 신화의 피해자들과는 사뭇 다른 결말이었다. 나는 그 이유에 대해 지난 2달간 종종 궁리해 봤는데, 적당한 설명은 떠오르지 않았다. 가장 그럴싸한 것은 내가 전생자라는 사실이다. 특히나 크툴루 신화라는 개념을 원래부터 창작물로 알고 있었다는 점이 내 정신을 쿠션처럼 보호해 준 것이 아닌가 추측해볼 따름이었다. 그밖에 나는 내게서 마땅한 특이점을 찾지 못했다. 여하튼 나는 아주 미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멀쩡한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주인님, 이제 여름이니 좀 씻으시는 게 어때요...?" 마리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뭐 어떤가, 집에만 있는데." 그리고 나는 그때마다 이렇게 합리적인 이유를 들어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최근 내 생활은 정신적 외상으로 인한 몇 가지 증후군으로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그 중 유독 두드러지는 것이 공수증과 외출 기피였다. (물론 광견병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물에 닿는 것이 싫어, 샤워는커녕 최소한의 면도조차 하지 않은 탓에 나는 무슨 부랑자처럼 보였다. 한창 심할 때는 물을 마시다가 컵 표면에 이슬이라도 끼면 발작을 했으니 마리가 여간 고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심지어 나를 위해 끓인 물을 딱 상온 수준으로 식히는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는데, 상태가 나아진 지금은 어디도 쓸데가 없는 기술이라고 푸념하기도 했다. 런던에서 끓이지 않은 물을 마시는 건 병원 신세 지기 딱 좋았기에, 그녀의 헌신에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외출 기피는 그보다도 심각한 문제였는데, 무엇보다 내 가계에 직접적인 타격을 줬다. 프랑크 저택 사건 이후로 요양을 빌미로 반년 동안 일다운 일이라곤 하지 않은 것이다. 4개월 휴식 후 재활차 처음 맡았던 일이 바로 제이콥 섬의 운석 재판이었고, 그 사건 이후로 나는 2달 동안 또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은랑백은 죽기 전에 내게 약속했던 추천장을 써서 보내줬고, 나는 그걸로 어느 대학에나 교수직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도무지 집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반년 동안 외출할 때마다 어떤 일들을 겪었는지 생각하면 말이다. 자연스럽게 내 인간관계는 협소해졌는데, 지난 2개월 동안 만난 사람이라곤 가정부 마리, 왕진 의사, 그리고 신문팔이 셋이 전부였다. 얼마 전, 나는 내가 폐인이 됐다는 공격적인 기사를 보고 실소했다. 그건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그러다보니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정적인 시기를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데 쓸 수 있었는 데 그것은 바로 번역이었다. 「마리 퀴리」 그렇게 적힌 노트는 다양한 언어로 서술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폴란드어였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프랑스어, 영어가 혼용되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녀에게 폴란드어보다 익숙할지 모를 러시아어는 전혀 쓰이지 않았는데, 나는 그것이 무의식적인 애국심의 발현이라 생각했다. 여하튼, 혼용이라고 하면 다양한 언어로 된 문장이라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퀴리는 그녀의 지성을 반영하듯 교묘하게 다국적 문장을 완성했다. 한 문장 안에서 삼 개 국어로 쓰인 단어는 쉽게 찾을 수 있었고, 심지어 일부 문장은 한 국적의 문법으로 쓰이지도 않았다. 각 문장은 다국적 언어로 구성된 암호에 가까웠고,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그나마 유지되던 언어 정체성마저 무너지며 독자적인 언어를 재창조한 수준이었다. 그러한 이유로 나는 이것이 퀴리가 변화되어 가는 과정에 장시간에 걸쳐서 쓰인 글이라고 확신했다. 그 사실은 퀴리 부인의 생존 가능성을 시사했다. 적어도 갑작스럽게 제물로 바쳐지는 일은 없었던 것이다. 운좋게도 나는 영어 외에도 프랑스어를 꽤 익히고 있었고, 내가 아는 학자 중에 폴란드어를 할 줄 아는 자도 있었기에 편지를 보내서 해석을 의뢰하기도 했다. 물론 대부분은 내가 파-영(波-英)사전을 끼고 해결했지만 말이다. 그 다국적 암호를 해독하고 나니, 노트는 마지막에 가서 가장 불가사의한 대목을 드러냈다. 그것은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지구 상의 언어와도 다른 기원을 가진 것으로, 나는 문장이 시작되고 끝나는 대목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이와 유사한 언어로 쓰인 책을 딱 하나 알고 있었다. 「흑천복음」 폭풍우가 치던 밤, 어떤 사악한 계시가 내 허약한 몸에 내려와 쓰게 된 그 추악한 마도서를 다시 꺼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두 노트를 비교하며 번역 작업을 계속했다. 잠깐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광기가 다시금 내 정신을 좀먹으려 들었기에 번역은 더디게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운석 재판으로부터 두 달 정도 지난 어느 날이었다. "주인님, 몸에서 냄새가 나요." 신문을 읽고 있었더니 오후 티 타임을 준비해주러 온 마리가 갑자기 나를 타박했다. "뭐?" "악취요. 정말로, 오늘은 꼭 몸을 씻으셔야 해요." "그럴 리가. 나는 실내에만 있지 않나?" 나는 언제나처럼 같은 변명을 말했다. "하지만 몸에서 먼지 같은 냄새가 나는 걸요. 매일 책만 읽고 계셔서 그런 게 아닐까요?" "책에서 냄새가 난다고 읽는 사람한테까지 냄새가 나지 않네. 그리고 누가 이걸 먼지 냄새라고 표현하나." 내가 마리의 표현에 면박을 주자, 그녀는 준비하던 찻잔을 내려놓고 뒤돌아섰다. "그래요, 똑똑한 주인님과 다르게 저는 또 무식한 표현을...." "제발 그만 좀 하게. 내가 언제 자네를 무시했다고 그러나." 그런 회화가 질릴 대로 질린 나는 질색하며 말을 끊었다. "아무튼 주인님, 정말 냄새가 심하시니까 오늘은 꼭 씻어주세요." 오늘은 어쩐지 평소보다 끈질겼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딴청부리며 신문을 넘겼다. "오늘은 재밌는 기사가 실렸군." "또 그렇게...." "아니, 정말로 말이네. 자네가 좋아할 것 같은 기사군그래." "정말요? 뭔가요?" 마리를 향해 나는 기사 제목을 들이밀었다. 『런던에 늑대인간 나타나다!』 "그렇지 않나?" "그렇네요." 처음에 나는 늑대인간이라는 표현이 문학적 은유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기사를 읽을수록, 그 내용이 진지하다는 걸 깨닫고 기사에 대한 흥미를 잃었다. 내가 여가답지 않은 여가를 보내는 동안, 런던 신문사들은 또다시 판매 부수를 높일 허황된 괴담을 만들어 내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이건 진짜일까요?" "제발 자네까지 요즘 젊은이처럼 굴기인가? 이런 게 다 가짜란 건 알잖나." "그러면 이건 뭔데요?" 마리는 기사에 실린 사진을 손가락으로 집었다. 야밤에 찍힌 흐릿한 사진이었다. 상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은 탓에, 사진에는 짐승인지 사람인지 모를 것의 실루엣만이 간신히 담겨 있었다. 사진 속 피사체는 네 발로 엎드려 있었고, 사진사 쪽을 희번뜩대는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으며, 턱 아래로 짐승처럼 털이 잔뜩 삐져나와 있었다. 이 시대의 대중은 사진을 의심하는 법을 몰랐다. 합성 기술이 없는 것도 아니었음에도, 사진이 있다면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곤 했다. "이런 사진은 누구라도 만들 수 있네." "털은요?" "이 정도면 분장할 필요도 없이 수염만 조금 길러도 되겠군." "아, 정말이네요." 마리는 내 턱을 바라보며 외쳤다. 나는 그녀의 경거망동한 시선에 대한 경고를 담아 노려봤다. 어쨌거나 기사 내용은 이러했다. 지난 5개월간 런던을 떠들썩하게 만든 범죄자의 정체가 늑대인간으로 밝혀졌다는 것이다. 늑대인간에 대한 시민들의 공포는 극에 달해, 경찰은 하루에도 3~4번씩 그가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았고, 온갖 검증되지 않은 괴담이 신문사로 쏟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늑대인간이 저질렀다는 범죄는 목록만 나열해도 몇 줄을 차지하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은 폭행치사, 방화, 노상방뇨, 여성 추행, 남성 추행, 절도, 기물 파손, 성상 모독, 주거 침입 등으로, 손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가구 수만 50을 넘었다. 그는 밤마다 네 발로 런던 뒷골목을 뛰어다니며 오늘 밤의 피해자를 물색하는데, 그 속도는 런던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보다 빨랐고, 그의 사진을 찍으려는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으며 딱 한 장 찍힌 사진이 기사의 그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편당 5실링 받는 저질 소설가도 이것보다는 글을 성의있게 쓸 것이다. 요즘 같이 경기가 흉흉할 때마다 으레 도는 야화였지만 이번의 것은 개중에서도 유독 질이 낮았다. "이걸 보니 머리가 아프군. 가져가게. 차는 잘 마시겠네." 그렇게 나는 흥미진진한 표정의 마리에게 신문을 건네고, 차 한 모금에 그 기억을 머릿속에서 씻어냈다. 다음 주. 나는 여전히 퀴리 부인이 남긴 노트를 번역하기 위해 씨름하고 있었다. 작업은 여전히 진행되질 않았고, 나는 숨을 돌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창 밖을 내다봤다. 그러다 마침 지나가는 신문팔이 소년을 발견하곤, 창문을 열고 그를 불러세웠다. "어르신, 신문 사시겠어요?" "어떤 게 있지?" 소년은 신문 가방을 뒤적거리면서 신문 이름을 하나씩 읽었다. "데일리 텔레그래프가 있고요,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데일리 메일이 있어요." "더 스케치는?" "그건 없어요. 구해 드릴까요?" 나는 고개를 젓고 소년의 손에 1실링짜리 동전을 올려주었다. 신문 3부, 저렴한 데일리 텔레그래프라면 12부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런던 뉴스 한 부, 잔돈은 가지게." "감사합니다, 어르신!" 소년은 동전을 확인하고는 밝게 웃으며 신문을 내밀었다. 나는 신문을 받고 창문을 닫았다. 창문 닫히는 소리를 들었는지, 마리가 방 안으로 들어오며 투덜거렸다. "또 그 신문팔이한테 팁을 주셨어요?" "열심히 일하는 기특한 아이가 아닌가." "기특하기보다 영악한 아이겠죠. 그 아이, 주인님이 신문을 살 때까지 창밖에서 서성거리는걸요. 항상 돈이 없다고 말씀만 하시지 마시고, 그런 부분을 절약하셔야죠." 마리의 번거로운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나는 기사 내용을 확인했다. 첫 장은 항상 그렇듯 광고였다. 나는 페이지를 넘기고 첫 기사를 확인하자 그대로 신문을 접었다. "애초에 항상 돈을 충동적으로 쓰니까 가계에 구멍이 나는 거예요. 훌륭하신 분이 어쩜 그렇게 경제관념이 없을까요." "내 어머니처럼 구는 건 그만두고 이거나 보게." "뭔데요?" 내게서 받은 신문을 든 마리는 기뻐하는 목소리로 외쳤다. "스프링힐드 잭이잖아요!" "저번 주는 늑대인간, 이번 주는 스프링힐드 잭, 영국 신문이 언제부터 프릭 쇼가 된 건가. 다음은 뭐지? 예티라도 데려올 셈인가?" 스프링힐드 잭.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런던을 떠들썩하게 하던 괴인의 별명이었다. 이름 그대로 뒷굽에 스프링을 달고 건물을 뛰어넘으며, 입에서는 불을 뿜고 군인도 두려워하지 않고 공격하는 괴물이었다. 아, 그 대단한 괴물 양반이 뭘 하냐면, 건물 사이를 뛰어다니다 혼자 있는 여성을 발견하면 추행한다고 한다.런던의 수많은 괴수와 비교하면 퍽 알기 쉬운 동기를 가졌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건 전부 가짜야." 나는 그를 영국 신문사의 구원 투수 같은 존재로 해석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 괴기 소설가나 잡아서 적당히 기사로 꾸며진 소설을 쓰게 하고, 으스스한 삽화 하나만 그려넣으면 신문이 불티나게 팔려나니까 말이다. "그래도 이런 게 재밌잖아요." 마리는 그런 괴물이나 살인자에 관한 신문을 수집한다는 엽기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과거에도 별로 좋게 생각하진 않았지만, 실제로 그런 괴물들이 음지에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된 지금은 도무지 편하게 볼 수 없었다. "주인님도 이런 사건 자문을 자주 맡으시면 좋을 텐데요." "자네는 대체 내 일을 뭐라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주인님은...." ───찌르르. 현관에서 벨 소리가 들리자, 마리는 신문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제가 나가볼게요." 나는 마리가 방문을 열고 나가자, 직접 방문을 다시 닫았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와 두 남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성 쪽은 마리였지만, 남성 쪽은 언젠가 들어본 듯한 목소리였지만 잘 기억나지 않았다. ───똑똑. "주인님, 지인 분께서 찾아오셨는데요." "들어오라 하게." 나는 자리에 앉고 어지러운 책상을 정리했다. 흑천복음과 번역본은 결코 남에게 보여줄 것이 못 됐다. ───덜컥. 문이 열리고 한 경관 차림의 남자가 들어왔다. 나는 마침내 목소리의 정체를 기억해내고 쓴웃음 지었다. 상대는 내 마지막 기억과 다르지 않게 여전히 경직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처음 찾아뵙습니다, 허버트 남작님." "승진했다고 들었네, 윌슨." 그는 이전 날, 제이콥 섬이 가라앉는 순간에 나와 함께 했던 젊은 경관 피터 윌슨이었다. 당시에는 순경이었지만, 지금은 형사였다. "덕분입니다." 윌슨은 뻣뻣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의 어색한 미소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건 아마 내 탓이었다. 그날, 빈 건물을 뒤지며 퀴리 부인을 찾던 윌슨은 비록 섬에서 있었던 모든 일을 보진 못했지만, 적어도 그가 본 바에 대해서는 솔직하게 전부 보고하기로 했다. 그 때문에 윌슨은 기관총 테러를 막았다는 이야기와 함께 근무 중 마약을 한다는 헛소문이 함께 돌아 해임 위기에 처했다. 그가 보여준 용기에 대한 보답으론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그 소식을 전해 듣고, 범죄 수사국(CID) 국장에게 친필 편지를 써보냈다. 윌슨과 달리, 나는 당일 사건에 대한 진실을 은폐하고 대신 그 자리를 윌슨 순경의 허무맹랑한 활약에 대한 거짓말로 채웠다. 국장은 나와의 개인적인 친분과 더불어 당시 내가 섬에서 있었던 일의 유일한 목격자라는 점을 참작해, 윌슨의 활약을 인정하고 해임은커녕 직접 CID의 형사로 특진시켰다. 사건 해결 하나로 순경에서 형사, 유례없는 특혜였다. 하지만 윌슨은 그날 이후로 꾸준히 보내오던 안부 편지를 그만두고 연락을 두절했다. 고지식한 그는 이번 승진에 내가 관여한 것을 깨닫고, 나와의 친분을 유지하는 것이 심각한 부정에 가담한 것처럼 느낀 것이었다. 그는 런던에서 보기 드문 성실한 청년이었고, 나는 젊은 펜팔 한 명을 잃고 한동안 우울해했다. "눈은 좀 괜찮은가?" "네, 시력은 모두 돌아왔습니다." 아, 그리고 나는 그의 눈을 찌른 적이 있다. 불가항력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어떤 일로 찾아왔나?" 어쨌거나, 그런 사건들을 통해 나는 윌슨의 성격을 잘 알게 되었고, 그가 개인적인 용무로 방문할 리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경찰 직인이 찍힌 편지 한 통을 내게 내밀었다. "오늘은 CID 수사관으로서 사건 해결의 정식 협조를 요청드리러 왔습니다." 나는 편지를 받아 들고, 서랍에서 페이퍼 나이프를 꺼냈다. "내용을 보고 거절할 수도 있네." "거절한 적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특히나 이런 종류의 사건에선 말입니다." 나는 나이프로 깔끔하게 편지 봉투를 열었다. "사건은 총 두 건입니다. 두 사건은 연관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내게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그런 사건이 아니었다면 선생님께 협력 요청드릴 필요도 없었겠죠." 일리 있는 말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각 사건의 비공식 명칭은 이렇습니다." 나는 두 장의 문서를 펼쳐보곤, 큰 글씨로 적힌 두 사건명을 읽고 인상을 확 찌푸렸다. 윌슨은 차려자세를 취하며 말했다. "늑대인간 출현 사건. 스프링힐드 잭 출현 사건. CID는 두 건의 사건에 정식으로 필레몬 허버트 남작님께 수사 협력을 요청드립니다." 12. 주다와 패트릭의 저녁 식사 이튿날, 나는 마리의 재촉에 밀려 면도했다. 2달 만의 쾌거였다. "어머, 그래도 수염을 다듬으니 훨씬 보기 좋네요." 막상 깎고 나니 개운한 것이 제법 마음에 들었기에 나는 별말 없이 수긍했다. 그렇지만 샤워만은 하고 싶지 않았기에, 마리에게 부탁해 양동이 가득 물을 받았다. 마치 해군 시절처럼, 나는 수건을 적셔 몸 구석구석 조심스럽게 닦았다. 몸을 닦은 수건을 짜내자 검은 흙탕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군 시절이나 탐험하던 시절에 워낙 불결하게 지내는 게 익숙했던 탓에 별 감흥은 없었다. 그 광경에 오히려 충격받은 건 마리였다. 그녀는 양동이에 가득 찬 땟국물을 버리고 오더니, 어떻게든 방 청소를 하겠다며 나를 내쫓았다. 방 안에서는 부산스럽게 바닥을 쓸고 닦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너무 결벽스러운 구석이 있었다. "보세요, 먼지가 이렇게 나왔어요." 그리고 한참 뒤에 마리는 먼지 뭉치를 모아오더니 자랑스럽게 내게 선보였다. "솔직히 말하지. 일평생 먼지 덩어리를 보여주고 반응을 보려는 사람은 처음이라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네." "주인님 방이 이렇게 더러웠던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먼지야 쌓이는 법이지." "아무리 그래도 누가 이렇게 먼지를 쌓아놓고 사나요!" "자네가 아직 더러운 꼴을 못 봐서 그러네." 나는 마리의 잔소리를 상대하는 데 지쳐 방으로 돌아갔다. 확실히, 바닥과 침대는 얼추 봐도 전보다 깨끗했다. 나는 괜히 흠잡을 곳이 없나 찾아보다 그만두고 외출 준비를 했다. 양복을 추스르던 나는 문득 빠진 것을 눈치채곤 책상 위를 살폈다. 다음은 서재 위, 그다음은 침대 위, 마지막으로 창틀을 확인했지만 어디에도 찾는 물건은 없었다. 나는 마지막 수단을 동원했다. "마리, 혹시 내 손목시계 봤나?" "손목시계요?" "그래, 자네가 치웠나?" 방 안에 들어온 마리는 불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주인님 물건에 손대지 않는 건 아시잖아요." "물론 잘 알지. 하지만 나도 자네도 아니라면 대관절 시계에 발이라도 달렸다는 건가?" 나는 불쾌한 투로 읊조리며 베개를 들췄다. ────찌르르. 현관 쪽에서 벨 소리가 들렸다. "빨리 좀 찾아보게." 나는 급하게 시계가 들어있을 리도 없는 서랍을 뒤적거렸다. "시계라면 제가 찾아올 테니 일단 다녀오세요." "뭐? 나보고 시계도 없이 외출하라는 건가? 그럴 순 없네!" 마리는 완전 고집불통이었다. 나는 거의 마리에게 떠밀리다시피 현관으로 밀려났다. "이봐!" "그러시다가 또 안 나간다고 하실 거잖아요."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가는 것이 더 우스웠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했다. "좋은 아침이네." "좋은 아침입니다, 선생님. 모시러 왔습니다." 문밖에 서 있던 윌슨은 경관모를 눌러쓰며 인사했다. 수사 민간 협력 요청. 나는 가끔 이런 제안을 받곤 했다. 그래, 마치 추리 소설 속 탐정처럼 말이다. 하지만 내가 그들만큼 통찰력이 있느냐고 하면 그건 결코 아니었다. 사실 내가 이런 제안을 받게 된 것은 어쩌다 쌓게 된 묘한 평판에서 비롯했다. 어쩌다 그런 이상한 명성을 쌓게 되었는지는 개인적으로도 의문이었다. 분명한 건, 내가 해결했다고 알려진 어떤 미제 사건이 첫 단추라는 것이다. "14년 전 사건이었죠." 윌슨은 느리게 걸으며 말했다. "노퍽 저녁 사건, 알아봤습니다. 유명 인사셨더군요." "덕분에 원치 않는 명성을 좀 얻었지." "훌륭한 일을 하신 겁니다." 1881년, 영국 전역을 충격에 빠트린 괴기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이 발생한 것은 노퍽 거리의 한 가정집으로, 예로부터 글 쓰는 양반들이나 모여 사는 런던치고는 조용한 거리였다. 피해자는 총 5명으로, 피해자와 가해자를 구분하는 것의 의미가 없을 정도로 지저분한 사건이었다. 모든 것은 해리스 주다가 그의 저녁 식사에 마틴 패트릭을 초대하면서 시작되었다. "식사 자리엔 주다의 두 딸과 아내도 있었죠." "비극적인 일이었네." 그것은 런던 역사상 가장 끔찍한 디너였다. 처음 신고한 것은 이웃집 주민이었다. 신고자는 주다의 집에서 비명과 이상한 괴성이 들리자 곧장 경찰에게 뛰어가 통보했다. 그는 경찰에게 "옆집에 강도가 든 것 같다"고 말했다. 주다네 식구는 언제나 교양 있게 행동하고 소리 지르는 모습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토록 주다는 이웃에게 신뢰받는 신사였다. 순찰하던 두 경관은 즉시 주다의 집으로 출발했다. 신고자와 경관들이 도착할 무렵, 귀가 따가울 정도로 들려오던 비명과 고함은 이미 멎어있었다. 커튼 처진 창문 너머로는 불빛이 새어나오니 빈집은 아니었다. 두 경관은 정황 파악을 위해 문쪽으로 다가갔다. ───쩝쩝. 노크하려던 두 경관은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참 이상한 것이, 주다가 그토록 교양 있는 신사라면 이렇게 게걸스러운 소리를 내진 않을 것이다. 듣고 있으면 사람보다는 개나 돼지가 사료를 먹을 때 나는 소리처럼도 들렸다. 두 경관은 노크하려다 말고, 문이 열려 있는 것은 깨닫고 살짝 문을 밀었다. 그러자 열린 문틈 사이로 도축장을 방불케 하는 악취가 쏟아졌는데, 이는 피와 내장, 그리고 장에 낀 오물이 뒤섞여야만 나는 그런 냄새였다. 그들은 심각한 사태가 벌어졌음을 직감하고 문을 열었다. 안에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아비규환이 펼쳐져 있었다. 모든 것이 붉었다. 식탁에는 다섯 명이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배가 갈라져 내장이 새어나오고 있었으며 눈알이 온전한 자가 없었다. 조촐하게 차려진 식탁 위에는 귀를 비롯한 알아보기 쉬운 인체 부위가 여럿 얹어져 있었고, 식탁 아래 깔린 아라비안 카펫은 흘러나온 핏물은 머금어 붉게 염색되고 쪼그라들어 있었다. 네 명은 시체였고, 움직이는 것은 한 명뿐이었다. 해리스 주다는 손가락을 쪽쪽 빨아가며 딸의 내장을 파먹고 있었다. "현장에서 체포된 주다는 그 자리에서 사망했죠." "과다출혈이었지." 추후 현장을 분석하던 경관들은 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초대받은 손님인 패트릭 역시 이 배덕한 만찬에 기꺼이 참가했다는 것이다. 그의 위에서는 소화되지 않은 손가락이 몇 개나 발견되었고, 입에서는 주다의 것으로 추정되는 식도가 발견되었다.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하나였다. 주다와 패트릭은 저녁 식사 도중에 다른 가족을 죽이고 서로 짐승처럼 물어뜯은 것이다. 사건이 알려지자 런던뿐만 아닌 영국 전체가 공포에 사로잡혔다. 명망있던 두 신사는 역사상 가장 엽기적인 살인자가 되었고, 패트릭의 가족은 사탄을 숭배한다며 지역민의 괴롭힘을 당하다 시골로 도망쳤다. 그러나 고향에도 그들이 머물 자리는 없었고, 런던에서 쫓아온 기자에게 두려움을 느낀 마틴 패트릭의 아내 헬렌은 유서도 남기지 않고 자살했다. 그날 이후로 식사에 이웃을 초대하는 정겨운 관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웃끼리는 서로 두려워하며, 어느 집을 들러도 현관문이 열려 있는 경우는 없었다. 이렇게 이웃을 두려워하는 현상이 영국 도처에서 발생했는데, 사회학자들은 이에 대해 '주다 증후군'이라 명명했다. 신문사는 연일연시 자극적인 기사를 써내기 바빴고, 역사상 유례없는 호황을 맞이했다. 그들이 돈더미에서 헤엄치며 기쁜 비명을 지는 동안, 대중의 관심이 높아질수록 범죄 수사국의 신음은 깊어졌다. "갓 출범한 수사국이 처음 맞는 난관이었습니다. 강력 범죄 처단을 내세우고 재편한 수사국이 언론에 주목을 받는 첫 사건이었으니까요." 런던 경찰조차 설립된 지 70년 안밖에 불과하건만, 그 안에서도 범죄 수사국의 역사는 유독 짧았다. 전 수사국 국장이 야심 차게 형사 200명을 차출하여 수사국을 개편한 것도 사건 발생 기준 고작 3년 전인 1878년의 일이었다. 대규모 재편 이후 마땅히 내세울 공적이 없었던 수사국에게 이번 사건은 입지를 다질 좋은 기회였다. 잘만 해결한다면 런던 시민에게 신뢰를 얻을 그런 기회 말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은 그런 논리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기괴했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너무 명백했다. 처벌할 사람도, 처벌할 방법도 없건만 민중은 어떻게든 해결만을 부르짖었다. 수사국은 무작정 수사를 감행했다. 전속 형사 30명이 투입되었으며, 현장 경비에는 군견 6마리와 군마 2필이 상시 동원되었다. 말 그대로 심혈을 기울였으나 대부분 형사는 뭘 조사하라는 건지도 알지 못한 채 시간만이 흘렀다. 대중의 기대와 관심이 시들 무렵, 수사국은 마지막 수단으로 민간인 수사 참가를 독려했다. 각 신문사에는 사건에 대한 자세한 정황과 어떤 사소한 단서라도 제보 바란다는 첨언이 붙어 있었다. "그때, 선생님의 편지가 수사국에 도착한 거죠." "대중은 극적인 연출을 좋아하지. 수많은 형사의 노고보다 어떤 천재가 편지 한 통으로 사건을 해결했다고 믿는 게 쉬운 거야. 애초에 나는 고작 두 문장밖에 쓰지 않았어." 1881년은 내 인생의 전환기였다. 왼 다리는 사라졌고, 평생 근속하려 생각한 군에서는 명예 제대했으며, 뭘 하건 노인처럼 의욕이 없었다. 나는 잠깐 빌린 아파트에서 새 일을 찾아본다는 명목으로 신문이나 책을 읽는데 하루 대부분을 할애했다. 그러던 나는 자연스럽게 사건에 대해 알게 되었다. 시간이 남아돈 나는 추리 소설의 해답을 추측한 팬레터를 보내는 가벼운 마음으로 편지 한 통을 작성해 수사국에 부치고 완전히 잊었다. 어떤 호사가는 내가 앉은 자리에서 사건의 전말과 범인의 이름까지 곧바로 유추해냈다고 주장했지만, 이건 아주 틀린 말이었다. 나는 무성의하게 딱 두 문장만 적어 보냈고, 그것이 21세기와 19세기간의 상식 차이를 메우며 사건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 것이었다. 이는 19세기의 특성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알다시피, 19세기는 유독 과학관의 팽창이 두드러진 시기로, 개인과 대중의 상식 차가 아주 극단적으로 벌어진 시대이기도 했다. 과학은 과학보다는 기술처럼 느껴졌다. 어떤 장인이 아는 비결을 다른 사람은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거기다 과학 수사라는 개념은 확립되지도 않아, 수사관과 전문가가 협업하는 일은 아주 드물었다. 몇 가지 잡학에 능통한 탐정 나부랭이가 경찰 앞에서 목에 힘을 주는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내가 상식이라 생각하고 보낸 그 문장은 우연히도 사건의 핵심을 관통하는 단서였고, 두 달 뒤에 배후의 진범이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실렸다. 그 무렵, 나는 영광호(HMS Glory)에 연구자 신분으로 탑승하여 대서양 위에 떠 있었다. 그 말은 즉슨, 어떤 허위 기사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기자들은 사건의 마지막 단물까지 빨아 먹겠다고 민간 협력자로 알려진 나에 대한 갖은 소설을 써댔는데, 아주 괴기 소설이 따로 없었다. 여하튼 나는 덕분에 이런 불가사의한 사건에 한해 불쾌한 명성을 가지게 되었다. 런던에서 기괴한 사건이 터지면 사람들은 반드시 날 찾아왔고, 그때마다 관계자로 내 이름이 언급되니 나의 불명예스러운 경력이 더욱더 확고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한 것이다. 저번의 제이콥 섬 재판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 뒤로도 많은 사건을 해결하셨잖습니까." "그래, 사람들이 항상 나를 보면 말하지. 집에 귀신이 씌였고, 자식에게 악마가 들렸다고. 나는 그치들한테 마루를 고치고, 자식과 대화를 좀 하라고 권하지. 이것도 해결이라면 해결이겠군." 가뜩이나 신문사에게 미움받게 된 나는 이런 사건들과 얽히는 건 사실 달갑지 않았다. 내가 기묘한 사건에 휘말릴 때마다 그들은 입꼬리에 미동도 안 오는 별명을 만들어 나를 조롱하려 들었다. "하지만 살다 살다 늑대인간을 잡아달라는 요구는 처음이네." "저도 그런 요청을 하는 건 처음입니다." 윌슨은 쓴웃음 지었다. "그래서, 얼마나 더 가야 하나? 잊었을까 봐 첨언하네만, 나는 걷는 게 썩 특기가 아니라네." "이제 금방입니다. 저 골목만 지나가면 됩니다." 이야기하는 와중에, 우리는 큰길에서 벗어나 꽤 으슥한 골목까지 들어와 있었다. "신문에는 늑대인간이 매일 밤 나타난다고 쓰여 있더군요." "위스키를 좀 마시면 늑대인간을 발견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지. 수염 기른 사람이야 어디나 있으니까 말이야." 윌슨은 잠깐 나를 쳐다봤다. "뭔가?" "아니요, 오늘따라 기분이 나빠 보이셔서 말입니다." 나는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닫았다. 괴팍한 중년인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나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런데 고작 시계 하나 잃어버렸다고 투덜대는 꼴은 내가 생각하기에도 영 아니었다. "계속 말하게." "경찰이 파악한 것으로 늑대인간이 출몰한 것은 3번입니다." 나는 눈썹을 꿈틀거렸다. "많군." "그리고 어쩌면 늑대인간일지도 모르는 것이 5번 더 있습니다." 거기까지 듣자니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늑대인간일지도 모른다는 건 또 뭔가?" "아시다시피 우리는 두 사건을 동시에 수사하고 있습니다. 늑대인간과 스프링힐드 잭. 그 5번의 출현은 어쩌면 스프링힐드 잭일지도 모릅니다." 문장 자체는 알겠는데 도통 그 의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치 고약한 수학자가 만들어놓은 수수께끼 같았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어딜 가고 있지? 경시청 방향은 아닌 거 같은데." "사실, 선생님께서 꼭 보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윌슨은 골목을 돌며 말했다. 런던의 뒷골목은 미로 같이 꼬여 있어 어디로 가나 또 다른 길이 나타났다. 길 곳곳에 묘한 악취가 묻어 있었다. 마냥 싫지만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역겨운 쪽에 가까웠다. "늑대인간이 마지막으로 출몰한 것은 이틀 전 밤이었습니다. 우리는 당시 피해자를 보러 갈 겁니다." "아, 좋군. 뭐라 하는지나 들어보지." 나는 어떤 사기꾼이 모습을 드러낼지 궁금했다. 요즘 런던에는 유명해지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하는 젊은이가 너무 많았다.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윌슨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와 그는 마지막 외진 골목에서 방향을 꺾었다. 그러자, 파리 떼가 얼굴로 날아들었다. 그것은 부패하기 시작한 주검이었다. 흐릿해진 동공 위로는 구더기가 기어 다녔고, 축 늘어진 혓바닥은 나뭇조각보다도 건조했다. 배가 갈라진 채로 내장은 좁지 않은 골목의 구석구석까지 쳐발라져 있었다. 우연으로는 만들어지지 않는 공들인 작품이었다. "당일의 피해자는 경찰마였습니다." 골목을 들여다보며 나는 모던 아트를 연상했다. 말의 내장으로 그린 세계 최초의 추상화였다. 13. 주홍글씨 나는 거인의 내장 위를 걷고 있었다. 그것도 죽은 지 이틀이 지나 말라 비틀어진 거인의 내장 말이다. 도처에 파리가 까놓은 알과 구더기가 기어 다녔는데, 나는 그것들을 의도치 않게 자꾸 밟게 되었다. 그때마다 구두 밑창 너머로 불쾌할 정도로 선명한 감각이 느껴졌다. 수많은 중세 화가들이 지옥을 묘사해 대중을 겁주려 했으나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저 죽은 지 이틀 지난 말의 내장을 보여주면 충분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장화를 신고 올 걸 그랬군." "원래 방침대로라면 곧바로 치우는 게 맞습니다." 내가 불평하자 윌슨은 경찰을 대변하듯 변명했다. "하지만 국장님 지시로 오늘까지 현장을 보존하기로 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사진만 봐서는 어떤 모습인지 모르실 거라고 말입니다." "이틀 전이라면 내게 아직 수사 협조 요청을 하기도 전 아닌가?" 윌슨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잠깐 그를 노려봤지만, 그게 괜한 화풀이라는 걸 인정하고 그만뒀다. 어쨌거나 그 말을 옳았다. 두 눈으로 보는 것과 사진으로 보는 것은 달랐다. 만약 내가 내장 융털을 눈으로 보지 못했더라면, 벽면에 발라진 이것이 무엇인지 짐작도 하지 못했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말 주검 부근으로 다가간 뒤, 지팡이를 휘둘러 그 위에 무리 지은 파리 떼를 쫓아냈다. "이 부분은 뭐지? 치운 건가?" 윌슨은 내가 말하는 부분이 어딘지 확인하기 위해 자신도 내장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창백한 안색으로 구역질했다. 그제야 나는 이 지독한 악취 속에서 내가 너무 태연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그동안 너무 지저분하게 살았는지도 모르겠다고, 어쩌면 마리의 말이 옳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 그건... 순경이 쓰러져 있던 자리입니다." 죽은 말이 찬 안장 뒤로 유일하게 내장이 발리지 않은 공간이 있었다. 가로로는 두 뼘, 세로로는 네다섯 뼘쯤으로 간신히 성인 남성 한 명이 웅크려 누울 정도였다. "자세히 좀 말해보게." 윌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건이 일어난 것은 이틀 전 새벽 1시나 2시 무렵이었다. 보통 밤에는 기마를 동원하지 않는 편이었지만, 늑대인간과 스프링힐드 잭을 발로 쫓을 수는 없다는 현장의 의견을 수용한 수사국은 기마의 사용을 허가했다. 기마 순경은 그렇게 야간 순찰을 하던 도중 어떤 존재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것은 종류를 불문하고 짐승인 것만은 분명했는데, 그는 보지 않고도 그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맹수 특유의 낮고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이 움직일 때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수색하던 순경은 마침내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피조물을 마주했다. 그것은 늑대인간이었다! 얼굴 전체에는 무성한 갈기 털이 나 있었으며, 반대로 몸은 사람과 같아 제대로 옷가지를 걸치고 있었다. 순경은 곧바로 그것을 쫓았는데, 그것은 자신이 쫓기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이 영악하게 골목 속으로 숨었다. 그것은 네발로 뛰어다녔는데, 말로도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기 때문에 잠시 그것을 놓치고 말았다. 그 순간, 인간도 짐승도 아닌 것 같은 괴성이 바로 옆에서 들리더니 말이 쓰러졌고, 순경은 바닥에 머리를 부딪쳐 그대로 기절했다. 순경이 발견된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고, 짐승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늑대인간을 봤다는 순경을 만날 수 있나?" 윌슨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나는 물었다. 이야기에는 영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윌슨은 유감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는 다리가 부러져서 요양 중입니다." "혹시 혓바닥도 같이 부러졌나?" 윌슨은 우물쭈물하다 순순히 사실을 털어놓았다. "맞습니다. 늑대인간을 본 이후로 그는 면담을 거절 중입니다. 하물며...." 윌슨은 살짝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그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짐작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오랜 세월을 함께 한 벗을 가장 처참한 형태로 잃은 것이다. "나약하긴. 전쟁터에서는 전우를 잃는 것도 한순간이었어." 나는 눈앞에 있지도 않은 이름 모를 순경을 핀잔하며 탓했다. "사냥을 마친 짐승이 뭘 하는지 아나?" "잘... 모르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갑작스러운 질문에 윌슨은 당황하며 고개를 저었다. "먹지. 짐승은 먹기 위해 사냥하지, 전시하지 않네." 나는 골목을 크게 둘러보았다. "이 작업에 얼마나 걸렸을까, 한 시간? 두 시간? 피 냄새를 맡고 싱싱한 먹이가 눈앞에 둔 짐승에게 그 정도 집중력이 있다고 생각하나?" 살짝 허리를 숙이며 죽은 말을 살폈다. 썩은 살갗은 부패하여 점액질 덩어리처럼 되었으나, 나는 아직도 많은 정보를 거기서 찾을 수 있었다. 말의 동공에는 손가락 크기의 구멍이 뚫려 깊숙이 파여 있었다. "덮치는 순간에 엄지로 눈을 노렸군, 말을 잡는 법을 알아. 군인 출신인가?" 다음에는 내장이 쏟아져 나온 복부 가죽을 지팡이로 뒤적였다. 부채꼴 모양으로 내용물을 쏟아낸 그 역겨운 모습과 달리 뱃가죽 쪽 털에는 핏물이 거의 묻어 있지 않았다. 대신에 나는 말의 목 쪽에서 작은 상처를 발견하고는 그 아래 덮여있는 내장 조각을 지팡이로 긁어서 떼어냈다. 예상대로 그 밑에서는 선명하고 넓은 핏자국이 나타났다. "이자는 아주 뛰어난 기술을 가졌군. 한 번에 목을 지나는 혈관을 잘랐어. 이 정도 출혈량이니 죽는데도 제법 시간이 걸렸겠지. 내장을 쏟아내고 죽은 게 아니라, 죽은 다음에 내장을 꺼낸 거네." 나는 바닥에서 말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목에서 피를 쏟아내는 장면을 떠올렸다. 범인은 그것을 멀리서 방관하며 말이 죽기를 기다리다가, 죽은 말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낸 것이다. 그것은 늑대인간 같은 허황한 망상보다도 훨씬 끔찍했다. "아까 이야기를 들을 때부터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이러면 말이 되는군. 범인은 공간 감각이 뛰어나며, 런던 지리에 해박한 자임이 틀림없네. 일부러 말이 달리기 힘든 좁은 길로 유인했으니 순경은 상대가 말보다 빠르다고 착각한 거야. 그리고 그런 자라면 이렇게 샛길 많은 골목에서 추격자의 사각을 잡기도 쉬웠겠지." 내 머릿속에는 범인의 대략적인 윤곽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명쾌했다. 사족보행이나, 갈기 털 같은 것은 밤이 만들어낸 환각 속에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었다. 혹은 착란을 일으킨 순경이 자신의 기억을 날조해서 증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질문이 하나 남는군, 왜 그랬을까?" 하지만 마지막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모든 매듭이 풀려나가는 와중에, 마지막 고리 하나가 저 고르디우스의 매듭처럼 단단히 묶여 풀리지 않았다. "왜?" 누가 무엇을 위해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가 있단 말인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어떤 사교 집단의 이단적인 제사 장면이 떠올랐다. 그들은 새벽녘에 사악한 주문을 외우며 말의 내장을 그들이 섬기는 악마에게 바치고, 정결한 순경의 영혼을 더럽혔다. "대체 왜?" 하지만 그조차도 상황에 대한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들이 경찰을 덮칠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나는 문득 시간을 확인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졌다. 하지만 내게는 시계가 없다. 이렇듯 내가 떠올릴 수 있는 가장 기괴하고 역겨운 상상조차도 이 현실을 설명하지 못했다. "왜?" 나는 지팡이를 치켜들었다. 그리고 꾸물거리는 파리 구더기를 내리찍었다. 런던의 저변에 어떤 끔찍한 존재가 다시 태동했단 말인가? 그 악마는 온 런던 시민을 제 먹이로 삼을 테고, 내 시계를... 젠장! 그 망할 놈의 시계 때문에 사고가 돌아가질 않는다! "선생님." 윌슨의 목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내가 조금 격양된 모양이었다. 이게 다 시계를 잃어버린 탓이다. "미안하지만 돌아가서 좀 쉬어야겠네... 집에서 시계도 좀 찾고 말이야." "그 전에 드릴 게 있습니다." 나는 윌슨이 내미는 편지 봉투를 받았다. "박사님께서 전해달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요." "박사?" 편지지의 겉봉에는 발신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헨리 지킬 박사」 그날 저녁, 나는 런던 중심가에 있는 레스토랑 앞에 도착했다. 나를 데려다 준 마부는 내 목적지를 듣고는 굉장히 공손한 태도로 대접해줬기 때문에, 나는 기분이 썩 좋아져서 그에게 팁으로 웃돈을 쥐여줬다. 「르 호튼」 런던 길드홀이 보이는 장소에 놓인 이 격조 높은 레스토랑은 놀랍게도 50년 전까지만 해도 영국 상류층으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았다. 당시 귀족의 사교장은 아름다운 템스 강을 배경으로 한, 소위 '강물파(River line)'라고 불리는 6개 레스토랑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역학 관계는 산업화가 본격화 되며 완전히 뒤집히게 되었는데, 템스 강이 그저 식욕을 떨어트리는 흉물로 전락한 이후 강물파는 모두 폐업하거나 이전했고, 르 호튼은 이견 없이 런던 최고의 레스토랑으로 거듭났다. 영국에서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프랑스 식사를 제공하는 이 레스토랑에서 유감스럽게도 음식은 주역이 아니었다. 대부분 손님은 셰프에게 모든 것을 맡겼고, 그나마 메뉴를 지정하는 손님은 자신이 아는 프랑스어를 자랑하고 싶어하는 사람뿐이었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언제나 사람이었다. 왕가에 충성하는 명망 높은 귀족, 런던에 공장을 소유한 기업가, 그리고 대부분은 그들과 친해지고 싶은 아첨꾼이 음식에 꼬인 파리처럼 모여들었다. 나 역시 한때는 이곳에서 런던의 명사들과 친분을 다지곤 했지만, 4년 전 귀족 사회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한 이후로는 첫 방문이었다. ───딱. 딱. 목발과 지팡이 소리는 이럴 때 얼마나 소란스러운지! 나는 사방에서 날아오는 시선을 느끼며,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했다. 대부분의 시선은 무관심하게 스쳐 지나갔다. 가끔 신문에 실리는 것 말고 이렇다 할 재주가 없는 런던 괴짜와 친해지고 싶은 사람은 없는 법이다. 하지만 몇몇 시선은 꽤 끈질겼는데, 그것은 주로 악의에서 비롯되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그나마 호의에 가까운 눈빛을 찾아냈다. 맹금류 같은 눈을 가진 말쑥한 신사였다. 그는 거의 눈을 깜빡이지 않았는데, 어쩌다 한 번 깜빡일 때는 1초 이상 눈을 감았다가 떴다. 나는 그 눈에 거의 감시당하고 있다 싶었지만, 사실대로 고하자면 그리 불쾌하지 않았다. "지킬 박사님?"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지킬은 놀라운 첫인상을 주는 신사였다. 겉으로 봐서는 나와 비슷한 연배처럼 보였는데, 그에게서는 어떤 충동적인 기질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세운 규칙에 강박적으로 충실한 것이 분명했는데, 모든 손톱이 일정한 길이로 자라 있었고, 긴 수염에서도 삐져나온 털이 하나도 없었다. 지킬은 아주 넓은 미간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것은 살면서 한 번도 화내본 적 없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그런 것이었다. 허리는 그가 지켜온 규율의 올곧음을 엿볼 수 있을 만큼 아주 꼿꼿했고, 어깨는 정확히 그 위에 수직으로 놓여 있었다. 그런 선한 인상과 반대로 눈매만은 아주 날카로웠는데, 나는 금고를 연상했다. 그 안에 깊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만, 감히 캐내려 들 생각은 들지 않는 견고한 금고 말이다. 눈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 척추가 피뢰침이 된 것처럼 전류가 관통했다. 그는 진짜로 지킬 박사였다! 나는 악수하는 내내 얼떨떨했다. 여기 오기 전까지, 나는 그것이 어떤 장난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동명이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마지막으로 든 생각은, 내가 평생 '지킬 박사와 하이드'라는 소설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놀랍군요, 정말로 실존하는 줄 몰랐습니다." 나는 떠보듯이 물었다. 내가 원하는 대답은 이런 것이었다. '아, 그런 소리를 종종 듣지요. 저보다 그 소설이 더 유명세를 떨쳐서 곤란합니다.' 하지만 지킬은 내가 원하는 어떤 대답도 주지 않았다. 그는 눈썹을 왼쪽 눈썹을 15도 정도 기울인 다음에 이렇게 말했다. "무슨 뜻이죠?"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지팡이를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남작님께서 이번 수사에 참가하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놀랐습니다. 이런 분야에서 런던 최고 전문가 아니십니까." "빈말로라도 사실이라 말하기 어렵군요. 그러면 혹시 박사님께서도?" 지킬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사 협력 요청을 받으면 가급적 거절하지 않고 있습니다." "훌륭하시군요." "과찬이십니다." 겸양을 말하고 있었지만 지킬은 스스로 예우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겸손함과 당당함을 동시에 겸비한 이중적인 면모는 그의 독특한 매력을 완성했다. 만약에 그가 *그* 지킬 박사만 아니었더라면 단숨에 흠모하게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걸 보고 오셨다고 들어서, 입맛이 없으실까 생각해 식사는 메인만 주문해 뒀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나는 그의 배려에 감사했다. 사실 그 역겨운 골목에 다녀온 이후로 뭔가 먹을 자신이 없었다. 나는 오는 도중에도 계속 무례하지 않게 식사를 거절하는 방법 따위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머지 않아 웨이터가 다가와 각자 앞으로 접시를 내려놨다. 접시 위에는 4조각으로 슬라이스 된 이름 모를 얇은 고기가 놓여 있었다. "어떤 고기 같습니까?" 지킬은 수수께끼를 내듯이 물었다. 나는 그가 뭔가 특별한 주문을 했으리라 짐작하고 포크와 나이프를 들었다. 고기를 먹을 기분은 아니었지만, 예의상 한두 점이라도 먹어두자고 생각한 것이다. 지킬은 나이프로 고기를 작게 잘라 입에 가져갔다. 너무 작게 잘라 심지어 입을 열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그는 최소한의 턱 근육만 이용해 고기를 씹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를 따라 고기를 잘랐다. 지킬의 것보다 얼추 2배는 큰 조각이 나왔지만, 이 경우는 비교 대상이 너무 작았을 뿐이었다. 나는 먹지도 않고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놨다. "말고기군요." "드셔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 번 타거나 만진 적은 있죠. 먹은 적은 없습니다만." 나는 너무 충격받은 나머지 심장이 떨렸다. 다른 영국인과 달리, 나는 말고기를 먹는데 어떤 거부감도 느끼지 않았지만, 그는 내가 보고 온 것을 알면서도 이런 주문을 했다. 그 의중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었다. "제 생각에 영국인은 말을 더 먹어야 합니다." 지킬은 담담히 말하며 고기를 잘게 잘랐다. 그 작은 고기조각은 지킬의 입가에 도착하면 증발하듯이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집중하지 않으면 그가 씹고 삼키고 있다는 사실조차 망각할 지경이었다. "적기조례가 폐지되지 않습니까. 마부들은 말을 내놓을 테고, 말 값이 아주 싸질 겁니다. 흑사병이 퍼지고 소를 먹기 시작한 것처럼, 이제 영국인은 돼지 대신 말을 더 많이 먹게 될 겁니다. 사회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진화하는 거죠." 나는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물로 입을 헹궜다. 처음 그에게서 느꼈던 신비한 매력은 이제 예측할 수 없는 불안감으로 바뀌었다. "전 여기까지만 먹겠습니다." "아쉽군요. 영국에서 이런 요리를 맛볼 장소는 흔치 않거든요." 지킬은 나를 따라서 식기를 내려놓고, 접시를 옆으로 치웠다. "오늘 초대 드린 건 다름 아니라, 남작님께 경고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그는 품에서 사진 두 장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렸다. 각 사진은 다른 두 명의 여인을 담고 있었는데, 둘에게는 닮은 점이 아주 많았다. 젊은 나이가 그랬으며, 적은 수입을 대변하는 듯한 조촐한 작업복 차림이 그랬다. 하지만 무엇보다 눈에 띄는 공통점은 두 사람 모두 내장을 드러낸 시체라는 점이었다. 짐승에게 파먹힌 듯이 이빨 자국 같은 게 남아 있었다. "끔찍하군요." "런던에서 늑대인간이 출현했다고 알려진 세 번 중 나머지 두 번입니다. 아시다시피, 헨리 6세께서 통치하신 이래 영국에는 사람을 덮칠 만한 대형 맹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늑대인간이라 부르는 거겠죠." 그는 사진을 돌려보며 말했다. "하지만 이빨 자국은 분명 사람입니다. 자, 어떤 사건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16년 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죠. 당시엔 정확히 말해서 먹지는 않았습니다만." 지킬은 사진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진범이 잡히고 사건은 끝났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었습니다. 마틴 패트릭에게는 아내 헬렌과 딸 셰리가 있었죠. 둘은 런던에서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웨일스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변하는 건 없었고, 헬렌은 자살을 선택합니다. 셰리는 지역 고아원에 들어갔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남겨진 셰리는 고아원 내에서도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린 그녀는 고아원에서 도망쳐, 숲 속으로 도망쳤습니다. 늑대가 출몰한다고 알려진 실그윈 숲이었죠. 저는 아마 소문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지방 사람들에게는 꽤 설득력 있었던 모양입니다. 누구도 저주받은 아이를 위해 숲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패트릭 가족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입니다." 지킬은 정말로 끝이라는 듯이 말을 멈추고 물컵을 입가에 대었다. 만약 그가 나와 인내심 대결을 할 생각이라면 나는 기꺼이 패배할 의향이 있었다. "죄송하지만, 제가 방금 이야기에서 놓친 점이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박사님께서 놓친 부분이 있을 것 같군요." 지킬은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랬습니다. 많은 사람이 이 사실을 놓쳤죠. 그래서, 15년 뒤 숲 속에서 헐벗은 여인이 나타났을 때, 누구도 셰리라는 소녀가 살아 있었다면 이런 여인이 되었겠거니 하는 점을 떠올리지 못했으니까요. 그보다 사람들은 그녀의 다른 특징에 주목했는데, 그녀가 사람보다는 짐승처럼 행동했다는 겁니다. 저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그랬듯이 늑대에게서 길러진 아이라는 소문이 퍼졌고, 그녀는 서커스단에 입단하게 됩니다." 담담하게 사실만을 나열하는 지킬의 화법은 사람은 지나치게 지치게 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끊고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서 그 여자가 셰리 패트릭이었다고 말하려는 겁니까?" "모릅니다. 확실한 건, 그녀의 행방이 그 뒤로 묘연하다는 점입니다. 누구는 그녀가 서커스단의 학대에 죽었다고 말하고, 누구는 그녀가 도시를 견디지 못하고 숲으로 돌아갔다고 주장합니다만." 지킬은 아까와 다른 사진을 꺼냈다. "얼마 전, 우연히 찍은 사진입니다. 마틴과 헬렌을 닮은 고운 흑발이었습니다." 저 멀리 보이는 빅 벤을 배경으로 한 사진 속에는, 반라의 여인의 흐릿한 윤곽이 어렴풋이 비추고 있었다. 여인은 팔을 다리처럼 땅에 붙이고 있었는데, 그 탓에 길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몸 위에 덮어져 감히 갈기라고 부르지 못할 것도 없어 보였다. "그녀가 16년 전 사건의 복수를 하려 한다는 겁니까?" "미치광이의 생각을 제가 어찌 알겠습니까." 지킬은 무심하게 답하고 식기를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법을 알아냈다면, 부모를 앗아간 런던에 복수하려 하지 않겠습니까? 16년 전, 남작님께서는 꽤 눈에 띄신 줄 압니다. 이건 그런 의미에서 경고입니다." ────달칵 달칵. 한동안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지킬이 기계적인 동작으로 고기를 잘라 입에 가져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집에 도착할 무렵, 거리에는 통행인은 한 명도 없었다. 나는 열쇠로 잠금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이미 늦은 밤이다. 마리는 집으로 돌아갔는지 실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현관이 잠겼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집안을 두루 돌아보며 모든 창문이 제대로 잠겼는지, 커튼이 다 닫혔는지 등을 확인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는 확신이 든 뒤에야 내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방의 불을 켜고, 코트와 모자를 벗어 건성으로 옷걸이에 걸쳐 놓았다. 나쁜 습관인 줄은 알았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 것 중 하나였다. 나는 쓰러지듯이 침대에 앉아 피로를 풀었다. 오랜만의 외출이었음에도 너무 장시간 돌아다닌 탓인지, 나는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잠깐만 누울 생각으로 침대에 몸을 눕히자, 내가 감히 어찌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수마가 나를 덮쳤다. ────덜컥.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창문 쪽에서 난 소리였다. 어둠 속에서 나는 창가를 응시했다. 창문 너머로는 바람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창문을 열어놓고 잤던가? 그럴 리가 없었다. 템스 강과 가까운 우리 아파트는 창문을 열면 냄새가 고약해 어떤 식으로건 깨닫기 마련이었다. 방금 소리는 창문이 열린 소리였다. 나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만약 도둑이나 강도가 창문을 따고 들어오려 한 것이라면 들어와도 진작에 들어왔어야 했다. 그럼에도 바깥은 으스스할 정도로 적막했다. 나는 전등을 켰다. ────핑.... 필라멘트에 열이 돌며 전구 표면이 떨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고요함 속에서는 전기가 움직이는 소리마저 들리는 것이다. 방 안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 아니, 변화가 있었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 분명히 입고 잠들었던 양복이 어느 틈에 벗겨져 있었다. 나는 거울 속에서 내 팔에 새겨진 붉은 글씨를 발견하고 팔을 눈앞으로 들어 올렸다. "윽...." 그 순간, 팔이 타는 듯이 뜨거워, 무심코 신음을 흘렸다. 팔 위에는 붉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수사를 멈춰라」 내가 그것을 읽자 글자가 흔들리며 움직였다. 그것은 내 팔의 굴곡을 타고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아, 그래, 그건 글자가 아니었다. 나는 마침내 깨달았다. 이것은 상처였다. 잠든 사이에 누군가 내 팔에 칼로 글자를 새겨놓은 것이었다. 14.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병 이튿날, 나는 한참을 고민하다, 저녁이 지나고 마리가 돌아갈 무렵 어렵사리 말을 꺼내놓았다. "자네, 당분간 나오지 않아도 좋네." 마리는 손을 우뚝 멈췄다. "뭐라고요? 못 들어서요." "생활비는 따로 챙겨줄 테니 한동안 한두 달... 아니, 조금 더 쉬다 오게." 사실, 나는 누구와 이런 얘기를 해본 적이 없었다. 일평생 남에게 상처 주지 않고 말하려는 노력을 해본 적도 없었단 말이다. 도무지 어떤 식으로 말해야 오해가 생기지 않을지 몰랐다. 그래서 별로 중요치 않은 듯이 말했다. 하루나 이틀 정도 휴가를 주는 것처럼 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하지만 이건 그렇게 넘어갈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말이다. "주인님, 저를 의심하는군요." "일단 들어보게." 나는 손을 살짝 들어 그녀를 만류했다. 하지만 한 번 흔들린 신뢰는 붕괴를 가속했다. "제가 시계를 훔쳤다고 생각하시는군요." "그런 의도로 한 말이 아니야." 전날 밤의 사건 이후로, 나는 주변에 너무 무심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그림자 위로 발을 걸친 나는 양지의 사람이 아니기에, 내 주변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끔찍한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은랑백이 그랬고, 리치먼드가 그랬으며, 그리고 마리 퀴리... 그녀도 그랬다. 나는 신변 정리의 필요성을 느꼈다. 어제 본 사진 속 여인들의 모습과 마리의 모습이 매 순간 곂쳐보였다. 나는 마리의 갈라진 배와 그 사이로 삐져나온 내장을 보았다. 지금도, 지금 이 순간도 그랬다! "우선 내 말을 듣게." 그리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가 주인님 물건에 손댈 이유가 없잖아요! 저는 지금 임금에 만족하고 있어요!" "그런 말이 아니야."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몰랐다. 내가 살해 협박을 당하고 있다고 말해야 하나? 자고 일어났더니 팔이 난도질당했다고? 나는 그것을 말해도 되는지 몰랐다. 말하기 전까지는 그리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기껏해야 한두 달 정도 뒤에 범인이 잡히고 상황이 안정되면 다시 불러오면 될 거라고. 하지만 누가 과연 살인자가 밤에 들어와 협박하는 집에서 일하고 싶을까. 마리는 계속 뭐라고 항변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 말에 해줄 대답이 없었다. 묵묵히 듣고 있자니, 그것이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같이 들렸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체 그놈의 시계, 시계! 그깟 시계가 뭐라고! "조용히 좀 하게!" 나는 입에서 나온 소리에 놀랐다. 관성을 받은 목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머리가 깨질 것 같아...! 나가게! 지금 당장!" 마리의 겁먹은 얼굴을 확인한 나는 양손으로 얼굴을 덮고 고개를 푹 숙였다.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멀어지는 걸음 소리가 들리고, 짐을 챙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동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닫혔다. 얇은 유리창 너머로 런던 밤거리의 소음이 고스란히 들려왔지만, 나는 홀로 적막을 느꼈다. 아, 그래, 나는 후회했다. 이 나이를 먹고도 고작 5분 전의 일을 후회할 만큼 어리석은 일이다. 표현을 조금 더 신중히 골랐어야 했다. 처음부터 진지하게 말하는 게 나았을 것이다. 5분 전까지만 해도 전혀 떠오르지 않던 문장들이 뒤늦게야 하나씩 사고의 수면 위로 올라왔다. 큰 의미는 없었다. 어쨌거나, 잘된 일이었다. 내가 지구의 음지에 걸쳐 있는 한, 그녀는 언젠가 보내야 했으니까 말이다. ────똑똑. "나가네!" 나는 고개를 치켜들었다. 지팡이를 잡고 급하게 일어나다 넘어질 뻔했으나, 어찌저찌 균형을 잡고 문 앞으로 향했다. 나는 손잡이를 잡았다. 문 앞에 서 있는 것은 처음 보는 경관이었다. 나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경관께서 야밤에 무슨 일이신지?" "지금 당장 와주셨으면 합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제야 나는 경관의 창백한 안색을 눈치채고, 평범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고 직감했다. 현장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화이트채플, 런던 최대의 빈민굴로 이어진 길은 봉쇄되어 있었다. 수십 명의 경관이 일렬로 선 채 거리를 막고 있었고, 두 명의 기마경찰이 살짝 떨어진 채 혹시 모를 탈출자를 감시했다. 행색이 안 좋은 몇몇 시민이 호소하며 경관에게 다가갔지만, 그들도 곧 나무 경봉을 맞고 도망치듯이 물러났다. 그들은 골목과 건물 안에 숨은 다른 사람들처럼 멀리 떨어져 봉쇄가 해제되기를 기다렸다. 바닥에는 핏물에 흥건히 젖은 남자 한 명이 엎어져 있었지만, 누구도 그를 신경 쓰거나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위에는 점잖은 양복을 입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아래에는 속옷조차 입고 있지 않은 추한 꼴이었다. 나는 그 참상에 압도되었다. 이곳은 여전히 런던 한복판이었지만, 나는 전쟁터 한복판에 소환된 군인의 심정을 느꼈다. "아, 선생님. 드디어 오셨군요." 나는 간신히 익숙한 얼굴을 하나 발견하고 안도했다. "이보게, 이게 다 무슨 소란인가?" "지킬 박사님이 옳았습니다. 거리 안에서 셰리 패트릭이 나타났습니다." 전날 밤 사진 속에서 보았던 여인의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윌슨은 참담한 얼굴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우리가 늦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복수를 마쳤습니다." 그순간, 저 멀리서 한 남자가 엎드린 채 달려왔다. 엎드려 있는 자와 마찬가지로 신사처럼 차려입고 하의만을 벗은 자였다. 입가에는 침이 질질 흘렀고, 짐승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막아!" 경관들은 앞으로 달려가 나무 경봉으로 그자를 에워싸서 구타했다.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렸으나 누구 하나 손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움직이지 않게 된 뒤에야 경관들은 손을 거뒀다. "보셨습니까? 우리가 늑대인간이라 생각하고 있던 자입니다. 그리고 저런 자가 거리에는 수두룩합니다. 16년 전과 똑같이, 셰리 패트릭은 사람을 짐승으로 만드는 방법을 손에 넣은 겁니다." 그건 불가능했다. 16년 전의 그것은 원하는 때 원하는 사람을 미치게 하는, 그런 편리한 주술 같은 것이 아니다. 어쨌거나 눈으로 직접 보고도 아니라 할 수 없었기에 나는 히스테릭하게 외쳤다. "그러면 가서 막아야지! 뭐하는 건가? 여기 평생 서 있을 셈인가?" "곧 군대가 도착한다고 합니다." 윌슨은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는 확산을 막기 위해, 그때까지 거리에서 누구도 나오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나는 잠시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의무감 하나로 제이콥 섬에 뛰어든 이 젊은 형사를 책망하는 건 어떤 의미도 없었다. 나는 내 총을 두고 온 것을 후회했다. "내게 총을 주게." "안됩니다!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나는 그와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도 이런 상황이었다. 그때와 같다면, 나는 이번에도 가야 했다. 나는, 나에게는 의무가 있다. "이봐, 잘 듣게. 나는 제대했지만 예나 지금이나 군인이네. 나는 여왕 폐하 앞에서 영국을 수호하기로 맹세했고, 언제라도 그 의무를 수행할 생각이야. 그리고 지금, 저 안에서 무고한 런던 시민들이 죽어나가는 동안 혼자서 안전한 곳에서 방관해야 하는 수모를 당하지도 않을 테고, 맨몸으로라도 들어가겠네." 윌슨은 내 눈을 마주 보며 몇 번이나 표정을 바꿨다. 그리고 결국 뒤에 있는 형사에게 가서 소총과 탄약통을 받아와 나에게 넘겼다. "마티니입니다. 전에 쏴보신 적 있으십니까?" "아니, 오늘 쏴보게 되겠군." 기존에 쓰던 총과 장전 방식이 다르긴 했지만, 적응하기 어렵지는 않아 보였다. "내 명예를 지켜줘서 고맙네." 나는 윌슨에게 감사를 표하고 거리 안으로 향했다. 한 경관이 제지하려 다가왔지만, 윌슨의 만류에 그대로 보내주었다. 그는 내 뒷모습을 향해 외쳤다. "지킬 박사님을 찾으십시오! 그분이 셰리 패트릭을 쫓고 있습니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끄덕였다. 거리 입구에서 느낀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화이트채플은 이미 전쟁터였다. 경찰이 거리를 구하러 온 것이 아니란 걸 깨달은 사람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스스로를 보호했다. 모든 건물의 문이 굳게 닫혀 있었고, 그 앞에는 조잡한 바리케이드가 처져 있었다. 바닥에는 이미 시체가 몇 구 버려져 있었는데, 나는 정신이 나간 자와 아닌 자를 쉽게 구분할 수 있었다. 정신이 나간 자는 여지없이 화이트채플에 어울리지 않는 신사들이었고, 그렇지 않은 자들은 허름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댄 채 흐느끼는 여인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도망치지 않나?" "어디로요? 밖에는 경관이 깔렸고, 거리의 모든 문이 잠겼는데."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손에는 궐련이 들려 있었는데, 이 고약한 냄새는 분명 우드바인이었다. 런던에서 구할 수 있는 가장 싼 담배였다. "늑대인간이 담배 냄새를 싫어한다는 게 사실일까요?" "큰 도움은 안 될걸세. 경관에게 가서 윌슨이라는 자를 찾게. 허버트라는 자가 보냈다고 하면 그가 보호해줄 거야." 나는 여인과 헤어지고 거리 안쪽으로 향했다. 안으로 갈수록 소동을 걷잡을 수 없었는데, 대부분 건물이 봉쇄되었던 거리 초입과 달리 문이나 창문이 부서진 건물이 늘어났다. 거리 곳곳에는 시체가 놓여 있었고, 그 중 대부분은 여성이었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몸을 팔러 온 자들이었다. 런던에는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낮에는 턱없이 낮은 임금을 받고 가정부나 재봉 공장에서 일하다가, 밤에는 부족한 돈을 보충하기 위해 화이트채플에서 동전 몇 닢에 몸을 파는 것이다. 화이트채플은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빈민굴인 동시에 창가였다. 런던에서 여유로운 삶에 익숙해진 나는 이 풍경을 너무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런던이 품은 어둠은 그저 비밀 장치가 숨겨진 저택이나 템스 강에 사는 이형의 존재 따위에서 비롯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런던의 저변에 깔린 가장 깊고 오래된 어둠이었다. 16년 전의 사건도 그렇게 시작되었다. 해리스 주다와 마틴 패트릭은 대외적으로 훌륭한 신사로 알려졌었다. 그들은 가정적인 가장이자 세간으로부터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나, 그 뒤로는 창관에서조차 해소할 수 없는 추잡한 욕망을 키우고 있었다. 한때는 화이트채플에서 저급 창녀를 사는 것만으로 만족했던 둘이지만, 성욕은 점점 비대해져만 갔고 결국 그들은 무엇에도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우연히 서로의 치부에 대해 알게 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끔찍한 범죄를 계획했다.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그것을 시행할 자금과 사회적 입지가 있었다. 둘은 존재하지 않는 법인명으로 지하실을 사고,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벽과 천장을 두텁게 공사했다. 그들은 화이트채플에서 흔한 무연고 여성을 돈으로 유인하고, 지하실에 끌어 들여 입에 차마 담을 수 없는 가학 행위를 반복했다. 협박과 회유로 여성의 입을 막은 그들은 서서히 요구의 강도를 높였는데, 그 과정에 여성은 눈과 귀 등 몇몇 신체 부위를 잃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두 남자의 가학심은 채워지지 않았고, 여성은 언젠가 자신이 죽을 것이라 예감했다. 한편, 이런 비밀을 공유하며 두 남자는 우정을 돈독히 했다. 누군가 배신하는 걸 막기 위해 서로 가족을 소개하고 집에 초대하는 등 교류를 이어나간 것이다. 그날의 사건 전까지 두 사람은 이런 우정을 이어나갔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건 세계 최초의 바이오 테러였다. 신문을 통해 두 사람의 증상을 알게 된 나는 문득 그것이 광견병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에 계획된 식인 같은 것이 아니라, 우연의 일치로 두 사람이 동시기에 발작했을 가능성 말이다. 정황상으론 손가락을 빨아가면서까지 먹었다는 표현도 미심쩍었다. 아무리 봐도 먹은 것보다 씹은 것에 가까운 묘사였다. 입이 움직이면 식도가 움직이니 씹히지 않은 신체 부위가 위에서 발견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는 편지에 두 문장을 적어서 경찰에 보냈다. '증상이 광견병이 의심됩니다. 잠복기동안 두 사람이 공통적으로 방문했던 장소나 만난 사람을 찾아보는 게 어떤지?' 시기는 1881년, 세균과 바이러스조차 소수 지식인의 막연한 추측 속에만 존재하는 가설에 불과하던 시기에, 누군가 의도적으로 타인을 감염시켜 죽인다는 발상은 쉽게 떠올릴 만한 것이 아니었다. 경찰은 이 정보를 토대로 두 사람에 대한 정황 증거와 목격 정보를 모아, 사건 발생 10일 전에 그들이 같은 건물의 지하실에 방문했음을 알아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지하실에 돌입한 그들은 끔찍한 광경을 목격했는데, 그건 감금된 채 썩어 문드러진 진범의 시체였다. 그녀는 광견병 걸린 쥐에게 자신의 몸을 물게 해, 스스로 매개체가 되어 두 사람을 감염시킨 것이다. 그 시체는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재판없이 바로 소각되었다. 10년 전, 루이 파스퇴르에 의해 광견병은 치료되며 식인 사건의 악몽은 잊혀졌다. 이제 인간은 짐승이 되는 병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은 욕망에 빠져 짐승이 된다. 인간과 짐승의 경계란 이토록 허술한 것이었다. ─────탕! 마티니에서 튀어나온 총탄이 광인의 몸통에 직격했다.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신사처럼 차려입고 하의만을 벗은 자였다. 나는 자세를 유지하기 위에 팔꿈치로 기대듯이 세워둔 지팡이를 다시 잡았다. "경관 주변으로 도망치게, 빨리!"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공격 당하던 여성은 내가 왔던 길로 달려갔다. 나는 지금 상황을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없었다. 정말로 셰리 패트릭이 돌아온 것인가? 복수하기 위해서?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것은 지금 상황에 대해 무엇도 설명할 수 없었다. 광견병은 잠복기가 아주 긴 바이러스고, 이렇게 사람을 식인 괴물로 만드는 병도 아니었다. 16년 전의 우연처럼 동시다발적으로 터트리는 건 당연히 불가능했다. 늑대인간. 나는 불현듯 그 단어가 떠올랐다. 정말로 늑대인간이 실존하는 건가. 나는 이 사건이 아주 쉬운 사건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늑대인간이나 스프링힐드 잭과 같은 어린아이를 속여먹기 위한 헛소문부터, 지킬 박사를 본 순간 하이드의 존재를 떠올리며 그가 진범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어떤 해답도 가지지 못한 채, 무작정 시체와 비명만을 쫓아갔다. 피 냄새를 쫓아가는 짐승처럼 말이다. 인간도 짐승도 되지 못한 자들의 비통한 꽥꽥거림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아, 그리고 마침내 도착했다, 혼돈의 근원지! 나는 피와 육편으로 뒤덮인 그 악몽 속에 떨어졌다. 익숙하던 풍경은 마치 지옥과 합쳐져 혐오스러운 기시감을 선사했다. 런던 병원, 150년 전통을 유지한 화이트채플 중앙 사거리의 병원은 악마에게 바쳐지는 제단이 되어 있었다. 병원에서는 핏물이 넘쳐 흘렀고, 그 앞에는 시체가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 창문에서는 미처 도망치지 못한 환자와 의사가 연이어 투신했다. 몇몇 의사는 마지막까지 환자를 밖에 던지다가 무언가에 습격당해 안쪽으로 끌려갔다. "하아... 하아...." 충격적인 광경을 뇌가 거부하듯이 시야가 흐려졌다. 이것은 역시 평범한 병이 아니다. 그보다 사악한 의지가 이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병원에 다가갈수록 들려오는 비명에 고막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 순간, 나는 3층 창문에서 내가 찾아 헤매던 자를 찾았다. "셰리 패트릭...!" 헝클어진 흑발을 가진 전라의 여인, 그녀는 앞으로 달려가고 있었고 바로 그 뒤를 어떤 남자가 뒤쫓았다. 뒷모습뿐이었지만 나는 그가 지킬 박사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병원 정문으로 향했다. "살려...." "아파...." "하아... 하아...." 시체 더미 속에서 아직 죽지 못한 환자들의 비통한 애원이 들렸다. 그것은 사람을 뭉쳐 만들어놓은 생명체 같이 꿈틀거렸다. "미안하네." 나는 살아날 가망이 없는 그들을 애써 외면하고 병원 안으로 들어갔다. 1층 복도에서 살아 있는 것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가득 찬 핏물은 1층 바닥을 가득 채우고 실외까지 흘러넘쳤다. 2층. 육편으로 가득 차 있었다. 광인들은 이미 사람보다는 짐승의 형상에 가까웠다. 늑대인간, 나는 다시 그런 단어를 떠올렸다. 목발과 지팡이 짚는 소리로 그들에게 들키지 않도록, 오직 팔심에 의존해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랐다. 3층. 2층과 달리 3층은 적막했는데, 계단을 경계로 공간이 잘린 듯이 어색했다. 나는 마티니 소총을 양손으로 잡고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아, 그리고 나는 병실 안에서 그것을 목격했다. 보이는 것은 지킬 박사의 등이었다. 그는 소총을 들고 있었고, 핏물에 젖어 있었다. "이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한 전라의 여인이 엎어져 있었다. 머리에 뚫린 구멍에서는 피와 뇌수가 새어나와 바닥을 적셨다. 지킬은 아무 흥분도 느껴지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셰리 패트릭은 죽었습니다. 사건은 끝났습니다." 15. 짐승이 사는 거리 달그락. 나는 찻잔을 접시 위에 올려놨다. 잘 보니, 찻잔 표면에 어떻게 생긴지 모를 얼룩이 있었는데, 오래 서 있는 것이 힘들어 설거지를 대충한 탓이었다. 차맛은 형편없었다. 찻잎의 관리를 잘못한 탓에 습기가 차서 눅눅해졌는데, 그냥 마시자니 여간 고약한 것이 아니라 우유를 더 탔다. 그러니 이번엔 양 조절을 어찌 잘못한 것인지, 밀크티라기보다는 그냥 생우유를 마시는 느낌이었다. ─────탕탕! 그래, 이런 소리였다. 그날의 악몽은 이런 식으로 끝났다. 뒤늦게 도착한 군인들은 거리를 일렬로 행진하며, 보이는 모든 것을 쏴버렸다. 그들이 지나간 길에는 피 냄새조차 덮어버리는 짙은 화약 냄새만이 잔류했다. 화이트채플에 가득한 시체는 모두 소각되었다. 인간과 야수가 같은 불 속에서 뒹굴었다. 그리고 셰리 패트릭... 그녀 역시 소각장의 검은 재가 되었다. 짐승은 빛과 소음을 두려워한다. 그렇기에 화약에 저항할 수 없다. 그날 나는 보고 말았다. 이미 완연한 짐승의 모습을 한 자들이 군인 피해 거리의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광경을. 그들은 아직도 런던 골목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다시 만난 그들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짐승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나는 그걸 구분할 수 있을까. ─────탕탕! 나는 화들짝 잠에서 깨어나듯 플래시백에서 빠져나왔다. 창밖에는 항상 이 길을 지나가던 신문팔이 소년이 서 있었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어르신. 신문 사시겠어요?" "글쎄... 어떤 기사가 실렸느냐에 따라 다르지." "데일리 메일에서 호외가 나왔어요." "마침내 기자들이 예티를 찾아낸 모양이구나. 한 부 줘보렴." 나는 소년의 손 위에 1실링짜리 동전을 올려줬다. 그는 세상만사 걱정 하나 없는 표정으로 행복해하며 내 손에 신문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창문을 닫고 자리에 돌아온 나는 신문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찻잔을 들었다. 그러다 문득 찻잔 위에 뭔지 모를 검은 불순물이 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다시 내려놨다. 대신에 퍽퍽한 스콘 하나를 입에 욱여넣고 씹어대며 신문에 집중했다. 『적기조례가 폐지되다!』 나는 별 기대하지 않고 본문으로 넘어갔다. 그도 그럴 것이, 기자란 무엇으로도 호들갑 떨 수 있는 자들이 아닌가. 그래서 나는 그것이 착실한 기사란 걸 깨닫고 크게 놀랐다. 적기조례 개정안이 마침내 폐지되었다는 대목에 이르자, 나는 신문을 덮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래, 시간이 흘렀다. 어느 정도 여름이 남아 있던 당시와 달리, 이제는 완연한 가을이었다. 차가운 소나기는 더는 레인 코트 한 장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못 됐다. 우산을 챙기는 걸 쉽게 까먹는 내게는 괴로운 계절이었다. 그 사이 나는 마리를 다시 부르지도 못했고, 새로운 가정부를 구하지도 못했다. 나는 여전히 안전하다 느끼지 못했다. 간간이 들려오는 스프링힐드 잭의 소문은 더는 가벼운 풍문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내 일에 다른 사람을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결코,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먼저 사과하지 못함은 아니었다. 나 같은 자가 뭐가 아쉬워 가정부도 없이 생활해야 한단 말인가. 여하튼, 그동안 나는 새로운 일을 얻었다. 은랑백의 추천장이 마침내 힘을 써준 것이다. 올드코트 대학(Oldcourt University). 수도원이었던 이곳은 외부와의 접촉을 엄금하고 자연 철학에 몰두하여, 한때는 이단으로 몰리기도 했으나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북런던을 대표하는 자연 철학 대학 중 하나였다. 나는 그곳에 겨울부터 교사를 맡게 되었다. 한 가지 걸리는 점은 대학이 가진 기이한 관습이었다. 부지가 좁은 탓에 고작 3개의 칼리지로 나뉘어 있음에도 올드코트는 칼리지 사이를 철저히 분리했다. 학생이나 교사는 타 칼리지에 방문하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고, 심지어 커리큘럼과 자료동, 연구실마저도 공유하지 않았다. 즉, 대학은 서로 다른 서적을 가진 3개의 도서관을 가진 것이다. 나는 이 낡다 못해 불쾌한 관습이 현대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이 관습에서 벗어난 것은 학장뿐인데, 그는 전통에 따라 매일 다른 칼리지로 출근했다. 나는 계약서를 받아들고 한참 고민했으나, 나를 받아줄 만한 대학 중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결국엔 그 위에 서명했다. 내가 배속된 것은 성 헨리 8세 칼리지였다. 아직 내가 맡은 강의는 없었지만, 나는 아침 일찍부터 대학으로 출근했다. 요즈음 매일 같은 일과였다. 나는 항상 보는 사서를 향해 목례하고 곧장 계단으로 향했다. 목적지는 3층이었다. 나는 층계 앞에 멈춰 서고 잠깐 숨을 골랐다. 매번 이 순간이 고역이었다. "도와드릴까요?" 고개를 돌리자, 한 젊은 학생이 내 옆에 다가오고 있었다. "늙은이 취급하지 말게. 이쯤은 거뜬해." "필레몬 허버트 교수님이시죠?" "날 알고 있나?" "어... 교수님이 취임하신다고 했을 때, 학생들 사이에서도 좀 얘기가 많았거든요." 나는 대충 어떤 대화가 오갔을지 짐작하고 쓴웃음 지었다. "하지만 저는 환영이에요. 올드코트에는 항상 새 물결이 필요해요." "고맙네. 자네 같은 친구가 많았으면 좋겠군." 학생은 2층에서 멈췄다. 나는 살짝 고개 숙여 작별하고 그대로 3층으로 올랐다. 3-8번 서고. 나는 웨일스 지역 신문이 수집된 몇 권의 스크랩북을 뽑아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목에 건 안경을 쓰고 천천히 읽어가기 시작했다. 지킬 박사의 말에 따르면 셰리 패트릭이 나타난 것은 1년 전, 즉, 1894년의 일이었다. 나는 그가 실수하거나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줬을 가능성마저 고려해 1893년부터 모든 웨일스 지방 신문을 꼼꼼히 찾아갔다. 나는 손가락을 올려 신문의 부제를 하나씩 나열해 읽었다. 실그윈 숲... 늑대... 여인... 서커스.... 지난 며칠 간의 조사 끝에, 나는 하나의 기사를 찾고 손가락을 멈췄다. 그리고 신문 발행일과 신문의 부제를 확인했다. 1894년 11월 2번째 주. 『사람인가, 짐승인가? 실그윈 숲에서 나타난 수수께끼의 전라 여인!』 원색적인 문구로 뒤덮인 이 기사야말로 셰리 패트릭을 가리키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11월 이후의 신문 위주로 교차하며 확인했다. 내용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브리튼 제도에서 멸종한 걸로 알려진 늑대가 서식한다는 소문이 있는 실그윈 숲. 그곳에서 전라의 여인이 벌목꾼에게 발견되었다. 전형적인 웨일스계 여성의 외모를 한 그녀는 짐승처럼 네 발로 뛰어다녔는데, 곧 지역 사냥꾼들에게 포획당했다. 그녀는 어떤 언어에도 반응하지 않았고, 옷을 입히려는 모든 시도는 수포로 돌아갈 정도로 난폭했다고 한다. 여인의 처분에 대해 곤경에 처한 와중, 자신을 서커스 단장이라고 소개한 한 신사가 찾아와 10파운드에 여인을 사겠다고 제안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에 동의했는데, 10파운드라고 하면 런던에서 기껏해야 한두 달 생활비로밖에 쓰지 못할 돈이었다. 그들의 행적에 대해서는 이것이 전부였다. 어느 신문을 봐도 남자가 어떤 서커스를 운영하는지, 둘이 어디로 갔는지에 대한 기사는 일절 적혀 있지 않았다. "셰리 패트릭은 말을 하지 못했군." 그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나는 충격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사건 이후로 내가 느끼고 있었던 모든 이질감은 거기서 비롯되었다. 셰리 패트릭은 백치다! 애초에 문자를 모르는 그녀가 내 팔에 문자를 새길 수 있었을 리가 만무했다. 옷조차 입기를 거부하는 짐승에 가까운 그녀가 런던 경찰의 눈을 피해 모든 복수극을 세우고 실현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모든 사건에는 우연이 따라다녔다. 지킬 박사가 찍은 사진에 셰리 패트릭이 찍힌 것도 우연이었고, 그가 사진을 토대로 경찰과 나에게 셰리가 범인이라 각인시킨 다음 날 화이트채플 사태가 터진 것도 우연이었으며, 내가 보는 바로 앞에서 지킬 박사가 셰리를 쏴 죽인 것도 전부 우연이었다. 당연하지만, 이 정도로 우연이 겹친다면 그건 계획이다. 그것도 서서히 인식을 왜곡하는, 정교하게 맞물리는 시나리오 말이다. 만약, 내가 그자의 이름이 헨리 지킬이 아니었다면 어떤 의심도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어쨌거나, 나는 그에게 숨겨진 자아가 있음을 알았다. 스프링힐드 잭. 아직도 그는 멀쩡히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폭로해야만 했다. ─────쿵쿵! 그날 밤, 나는 지킬의 자택을 수소문해 도착했다. 그의 주택은 지킬의 편집적인 모습만큼 정결했는데, 인근 주택과 비교해도 두드러지게 깔끔했다. 잠시 후, 빗장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지킬은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허버트 박사님. 이런 밤중에 어쩐 일이십니까?" "자네였어. 자네가 셰리 패트릭을 런던으로 데리고 온 거야." 지킬은 놀란 기색 한 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절제된 감정 표현 때문에 나는 무심코 그가 나를 유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나는 지킬이라는 인물의 무엇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내가 아는 책 속의 등장인물과 너무나도 달랐다. "우선 들어오시죠. 우리는 할 얘기가 많아 보입니다." 지킬은 몸을 돌려 현관을 지나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순순히 그 뒤를 따랐다. 만에 하나 그가 입막음을 하려 든다 해도, 그와 같은 일반인에게 당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방 안에 들어간 나는 무심코 뒷걸음질 칠 뻔 했다. 깔끔한 건물 외관이나 현관과 달리, 방 안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나는 벽면 가득 채워진 여성의 사진과 그림을 봤는데, 대부분 여성의 나체와 성교를 묘사한 춘화였다. 나는 그 사이에서 셰리 패트릭의 사진을 아주 많이 발견했다. "알고 계십니까, 인간은 굉장히 모순적인 생물입니다. 선천적으로 잘못 설계된 것이죠. 실수하지 않는다는 신은 인간을 만들 때 그의 미숙함을 드러냈습니다." 지킬은 자신의 방에 대해 변명을 하듯 말했다. "하지만 저 찰스 다윈의 주장이 옳다면 우리는 아직 진화의 과도기에 놓인 것입니다. 짐승에서 인간으로, 본능에서 이성으로 가는 과도기 말입니다." 그는 벽면에서 사진 하나를 뜯어냈다. 그리고 무심하게 타오르는 알코올램프 위에 얹어놓았다. 탄 냄새가 방 안을 채웠다. "보시다시피 제 안에는 이성으로도 다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제 일생은 끝을 모르는 욕망에 비위 맞추며, 이 치부를 숨기고자 하는 투쟁사였습니다. 하지만 결국 보십시오. 그럼에도 제가 인두겁을 쓰고 있는 한, 저는 결코 이 충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었습니다." 밝은 조명 아래 지킬의 그림자가 아주 짧게 늘어졌다. 그것은 작고 투박한 등 굽은 난쟁이처럼 보였다. "악입니다. 자신의 내면에 악이 자리 잡고 있음을 안다는 게, 어떤 건지 아십니까?" "변명에 불과하네." "설마 전쟁터에 다녀오신 박사님께서 그렇게 말할 줄은 몰랐습니다. 설마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 울부짖는 저 바깥의 낙관적인 멍청이들과 같은 말을 하실 겁니까?" 나는 지킬의 혐오감 어린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그러던 와중에, 저는 한 소문을 접했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마침내 그녀를 찾게 된 것입니다. 셰리 패트릭!" 지킬이 설명을 계속하는 와중에도 알코올램프는 타고 있었다. 그 위에 놓인 플라스크 안에는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형체가 끓고 있었다. "멋지지 않습니까? 저것이 인간의 본 모습입니다." 그것은 검었다. 쉽게 말하는 흑색 따위가 아니라, 빛의 존재마저 망각하게 하는 순수한 어둠이었다. 그것은 끊임없이 요동쳤는데 그 탓에 나는 원근감마저 잊고 말았다. 그것은 플라스크 안에 갇혀 있었지만 내 눈앞까지 다가왔다가 점처럼 작아지기를 반복했다. "모든 충동과 욕망을 절제한 순수한 이성의 정수입니다. 우리 뇌 속에 잘 숨어 있었지만, 결국은 찾아냈죠. 저는 하이드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하이드, 그것은 요염하게 꾸물거렸다. 나는 역겨워 토할 뻔했다. "셰리 패트릭, 그녀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지킬은 담담히 고백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브리튼 제도에서 마지막 대형 야수가 목격된 게 400년 전인데, 지역민은 아직도 실그윈 숲에 사는 무언가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겁니다, 숲 속에 사는 어떤 형용할 수 없는 야수의 존재를. 무엇으로도 표현할 방법이 없느니, 그저 늑대라고 부르고 말았던 겁니다." 그는 벽면 한쪽을 쳐다봤다. 거기엔 셰리 패트릭의 사진이 가득했다. 대부분은 지킬의 추악한 외설에 대한 것이었으나, 일부는 차마 말로 형용하지 못할 사악한 고문과 실험으로 가득했다. "셰리 패트릭은 16년 전, 숲 속에서 그것과 바꿔치기 당한 겁니다. 그녀는 한때 인간이었지만, 15년 뒤에는 더 이상 아니었습니다. 저는 그녀가 인간과 짐승, 이성과 본능의 경계에 대한 해답을 쥐고 있으리라 생각하고 그녀를 사왔습니다. 만약, 그녀가 인간에서 완전한 짐승이 된 것이라면, 그녀가 가진 모든 성질을 인간에게서 절제한다면 인간은 영원히 욕구와 충동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나는 지킬이 바라보는 사진 사이에서 사람의 형태를 한 고깃덩어리를 발견했다. "그래서 저는 실험했습니다." 그것은 해부대 위에 구속된 채, 전신이 해부된 셰리 패트릭이었다. "실험 끝에 셰리 패트렉에게서 추출한 원액의 성분을 정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수천 년간 화학자들이 연구했던 어떤 원소와도 달랐고, 오히려 그 해답은 미신적인 연금술사들의 서적에 나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안에서 어떤 성분이 무엇이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고 또 인간으로 만드는지, 많은 임상시험 자료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늑대인간 사건을 일으킨 거군." 내가 노려보자, 지킬은 사소한 실수를 지적당한 사람처럼 수줍어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습니다. 피험자 선정은 신중했고 한 번의 실패는 큰 대가를 낳았죠. 조금이라도 배합을 실수하면 피험자는 야수가 그 자체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화이트채플 사건 이전에 일어났던 식인 사건, 나는 사진 속 여인들의 튀어나온 내장을 떠올리고 인상 썼다. "그 실수로 저는 경찰에 쫓기게 되었고, 실험은 아직도 많은 실패를 요구했습니다. 아주 빠르게 대량의 표본이 필요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화이트채플을 노렸군." "맞습니다. 밖에서는 신사라 불리며 꾸미는 자들이 그 거리에서는 정욕에 눈이 멀어 허리를 흔들어대고 있더군요. 인간보다는 짐승에 가까운 자들이었죠. 좋은 기회였습니다. 충분할 정도의 자료를 모았고, 저는 셰리 패트릭을 처리해서 후사의 염려도 없애기로 했습니다." 이제야 확신이 들었다. 그날의 사건은 모두 연출이었다. 지킬은 병동에서 누군가 자신을 쫓아올 때까지 기다리며, 풀어놓은 셰리 패트릭을 쫓아다니며 위협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지 않은 희생이었습니다만, 결과물과 비교하면 아주 소소한 수준입니다. 인류는 마지막 진화를 한 발 앞두고 있습니다. 20세기에 인간은 욕구에서 비롯된 비이성을 벗어던지고, 오로지 합리의 시대로 나아갈 것입니다." 지킬은 플라스크 속 내용물을 앰풀에 살짝 따랐다. 아주 적은 양만을 따랐는데도, 그것은 안에서 증식하며 앰풀을 가득 채웠다. "필레몬 허버트 박사님. 당신은 학자이며 본능보다 이성으로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제 말이 옳다는 것도 아시겠죠." 그는 앰풀을 내게 건넸다. 나는 손에 쥔 그것을 내려다 봤다. 앰풀 안에 든 것은 비명지르는 인간이었다. "아니, 나는 자네를 경찰에게 넘길 걸세. 자네는 여전히 추악한 짐승이야." 지킬은 미간을 좁혔다. "제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군요." ─────툭. 그 순간, 창문 너머로 무언가 부딪쳤다. "뭐지?" 지킬은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자, 창문이 깨지며 검은 형체가 지킬의 머리 위로 엎어졌다. 그것은 인간이었다. 아니, 인간의 형체를 한 숯덩어리였다. 육체는 완전히 불에 타 간신히 그 형체만 유지하고 있었고, 안면의 이목구비는 두개골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두피에는 몇 가닥 남지 않은 길고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이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단숨에 알아봤다. 그녀는 셰리 패트릭이었다. 그녀는 가슴과 배 부근에 있는 어떠한 부위로, 문자 그대로 몸으로 지킬을 감쌌다. "완전히 소각했다고 들었는데 놀라운 생명력입니다. 몸을 찾으러 온 건가? 그런 성질도 있나 봅니다." 지킬은 침착하게 그녀의 행동에 대해 분석하며 문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의 눈앞에서 문을 닫았다. "지금 뭐하는 겁니까? 제대로 판단하세요. 저것은 위험하지 않습니다. 별로 힘도 없습니다. 판단하세요. 제대로 판단하세요! 이성적으로 생각하란 말이야! 문 열어!" 문 너머에서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인체에서 나는 소리라기보다는, 나무를 압착할 때 나는 그런 종류의 소리 말이다. "문 열어...." 그 사이로 낮게 들려오던 목소리는 곧 사그라졌다. 문 너머 열기가 느껴졌다. 화재였다. 나는 짐승과 지킬 박사의 최후를 직감했다. 지킬은 응보를 받았으나, 짐승의 운명에 대한 사악한 호기심은 나를 움직였다. 나는 문을 활짝 열었다. 방 안은 짐승이 날뛰고 가기라도 한 듯이 어지러워져 있었다. 책상과 서재는 바닥으로 엎어지고, 마구잡이로 펼쳐진 연구 자료 위로 알코올램프가 쏟아지며 불길이 치솟았다. 플라스크가 깨지며 흘러나온 액체에서 고약한 독성 연기가 뿜어졌다. 셰리 패트릭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지킬 박사는 창틀에 손을 올린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돌아갈 수 없는 각도로 목을 돌려 나와 눈을 마주친 뒤에, 그대로 창 너머로 뛰어내렸다. 창밖에서 인간도 짐승도 아닌 것의 울음소리가 울렸고, 그에 화답하듯 짐승의 노래가 시작되었다. 아아! 그것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 아래 잠든 포식자에 대한 공포를 불러 일으켰다. 화재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 방 안에 가득했던 화학 약품들은 불길에 호응하듯 폭발했고, 이내 불길은 템스 강 맞은 편에서도 보일 만큼 거세졌다. 지킬 박사의 광기 어린 연구와 그 산물은 내 손에 쥐어진 작은 앰풀을 제외하곤 무엇도 남지 않았다. 나는 주변 시민들을 깨워 대피시켰다. 화재를 목격한 런던 소방대가 도착해 불길을 잡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끝없이 비대해질 것이다. 지킬 박사가 품었던 광상을 땔감 삼아, 런던의 필연적인 몰락을 예언하듯 밤새도록 타오를 것이다. 아아, 그렇다. 짐승은 여전히 런던에 살고 있다. 실그윈 숲의 짐승과 그것에서 비롯된 피조물들은 인간도 짐승도 되지 못한 채, 런던의 뒷골목에서 방황할 것이다. 그들이 빛과 소음을 두려워 하는 한, 우리도 그들을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 적기조례가 폐지된 런던은 그 어느 때보다 시끄러웠다. 하지만, 단 하루라도 자동차가 거리를 달리지 않고,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면, 런던이 침묵에 잠긴다면, 그들은 다시 거리로 기어나올 것이다. 어둡고 조용한 골목에 다가가지 않는다면, 아직은 그들을 두려워 할 필요가 없다. 아직은. 전툴루 관련\전툴루_15. 짐승이 사는 거리_ 불타는 연구실에서 도시로 뛰쳐나가는 지킬을 본뜬 짐승.jpg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여전히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쥐고 있었다. 지킬 박사는 내면의 하이드를 꺼내지 않았고, 그는 스프링힐드 잭이 아니었다. 셰리 패트릭은 그저 짐승에 불과했다. 그러면 대체 그자는 누구란 말인가. 늑대인간으로 착각될 만큼 사악한 야성을 지녔으며, 인간의 교활함을 함께 갖춘 악마는 여전히 런던 밤거리를 배회하며 내 주변을 얼씬거리고 있었다. 내가 잠드는 순간만을 기다리며! 그 순간 보았다! 런던의 밤하늘, 화재에 빛나는 저 적색 하늘에 악마가 있었다! 짐승같이 웃으며 지붕과 지붕 사이를 뛰어다니는 악마 말이다! 저자야말로 스프링힐드 잭 본연이다! 나는 홀린 듯이 그 뒤를 쫓았다. 아니, 실제로 나는 악마에게 홀렸다. 저자는 언젠가 나를 집어삼킬 테고, 내가 먼저 그를 죽여야만 했다. 어디로 갔지? 빈 런던 시내를 어지럽게 둘러보다가 골목 너머로 사라지는 인영을 목격했다. 과연, 짐승처럼 네 발로 뛰는 자였다. 런던의 사나운 바람이 거칠게 몰아치며 그 속에 짐승 울음소리를 실었다. 어느 틈에 모자가 벗겨져 있었다. 템스 강에서 불어오는 강풍에 날아간 것이다. 바람에 도둑맞은 유실물을 런던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것보다는 스프링힐드 잭이다. 나는 서서히 이 추격전이 끝이 다가옴을 직감했다. 저 멀리 보이는 것은 나의 아파트다. 그자는 흉계를 품고 나와 가정부를 해할 생각으로 아파트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아, 그 사악한 계획을 미리 알아낸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아파트 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집 열쇠가 문 구멍 사이에 꽂혀 있었다. 나는 품속을 뒤졌다. 없었다! 그자는 어떤 교묘한 술수로 내 열쇠를 몰래 빼간 것이다! 나는 문을 크게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은 짐승이 날뛴 것처럼 어지러웠다. 아주 짙은 흙먼지 냄새가 풍겼다. 마치 짐승이 체취를 지우기 위해 먼지구덩이 위에서 뒹군 것처럼 말이다. 현관에 찍힌 족적을 보고 하나의 진실을 깨달았다. 아, 그래! 그는 다리 하나가 없다! 그렇기에 네 발로 뛰어다닌 거다! 방 안에서 소리가 났다. 인기척, 나는 곧장 문을 열어, 그 흉물과 마주하였다! 내 얼굴이 털로 뒤덮인 광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건 거울이었다. "그래...." 광견병의 또 다른 이름. "나였어... 나는, 나는 미치지 않은 게 아니야...." 공수증. "내가 바로 스프링힐드 잭이었어!" "주인님?" 마리? "늦은 밤에 죄송해요. 아마 믿기지 않으실지도 모르지만, 제가 시계를 찾은 거 같아요. 이게 왜 제 침대 밑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정말로 제가 훔친 게 아니에요. 믿어주세요." "안돼, 오지 마! 내게 오지 마!" "주인님? 도대체 왜...." 나는 기쁜 마음으로 마리의 목을 물었다.